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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와 함께 비오는 거리를

능엄주 2021. 6. 4. 09:23

후배와 함께 비오는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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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이야기 많이 해도 돼. 저녁 식사는 다 준비해놓고 나왔어!"

코로나 19로 변화한 것은 집집의 식사 문화라고 할까. 코로나 19를 염두에 둔 면역력 증강 각종 음식이 냉장고에 조리된 채로 쟁여 있어, 남자 어르신들도 손수 데우기만 하면 곧바로 식탁에서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의 저녁식사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다는 후배와 나는 저녁밥을 먹는지 이야기를 먹는지 모르게 후딱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호젓한 식당에 오래 머물수가 없어 우리는 비오는 거리를 걸었다. 연희동 거리는 비가 내려 더욱 운치?가 있다고 할까. 마치 인사동 골목길에서 촌스러워서 더욱 볼품있는 야생화 꽃밭을 보듯, 기분이 삼삼했다.

 

"언니하고 이렇게 비오는 거리를 걸으니까 좋아요. 오늘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소리는 늘 부드러움과 애교, 평화가 느껴졌다. 느리고 기쁘게 걸어가면서 우리는 오랜만의 만남을 만끽했다. 하 오랜 만이라 무엇부터 이야기 할 지 몰라 거리 곳곳에 핀 여름꽃을 이야기하고, 새로 단장한 고품격으로 보이는 카페는 바라보기만 하면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마스크를 벗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대해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시로 우리는 코로나19를 의식할 만큼 제법 오래 산 나이가 걸림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내 고민과 아픔을 알아채는 후배를 만난 것, 함께 비오는 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있는것으로 이미 큰 위안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수긍했다. 후배의 언니는 나와 동기이고 한 반이었으면서도 그 친구는 동생인 후배와는 달리 말수 적고 성격이 뚱해 깊이 친하지는 못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윤이 나는 후배의 새까만 단발 머리와 유난히 반짝이던 눈동자에 한 눈에 반했던가. 후배는 그 시절부터 나를 반겼고, 내가 어려울때 기운을 돋아주었고, 좋은 일일 경우에는 큰 박수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던 것 같다. 

 

참으로 연희동은 내가 살던 그 당시와는 너무나도 멋지게 훌륭하게 변해 있었다. 연희동 거리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상전벽해를 대변하는 상징 같지 않은가. 그 대화에 이르러 우리는 둘다 똑같이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가부장제 유교 전통을 이어, 내 집 내 가족만을 위해 인생 모두를 걸고 희생봉사한 것, 그 결과가 이렇듯 발전 변화한 시대 상황에 뒤지고 있다는 것, 남은 것은 가없는 허무감뿐이라는 것.

이야기가 우리 세대의 비애와 절망감으로 옮겨갈 즈음 우아하고 고급한 변신을 거듭한 연희동을 지나 큰 길에 이르렀다. 차량들이 빗속을 질주하고 있고,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다.

 

"언니! 다음에는 집으로 와! 그래야 밥도 천천히 먹고 이야기도 많이 하지."

그녀는 전에 나를 집에 불러 먹기 아까을 정도로 주방그릇도, 담아낸 모양도, 음식 솜씨에서도 상급의

식사를 정성껏 나에게 베풀어 주었었다. 언제나 말도 예쁘게, 사랑스럽게 하는,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결혼한 후배는 평생 셋방을 살아본 일이 없는, 비교적 유복하게? 살아온 그대로였다.

버스에 올라 바라보니 그녀는 가지 않고 내가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는지 발돋음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정이란 무엇인가. 정은 유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얼마전 암으로 타계한 선배님을 회고했다. 선배는 일상생활의 지혜를 모두 터득한 백과사전이었다. 뭐든 물어보면 즉시로 정확한 답변을 준다. 총동창회 때 7~800여 명이 모이는 날, 제일 먼저 달려와 총동창회 총무를 맡아 동분서주하는 나를 남들이 다 알아보게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내 오빠와는 초등 동창이어서 나에게 각별했고 꽤 자주 만났다. 나는 현재도 여전히 선배님을 그리워한다. 교통사고라는 재앙을 만나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선배라면 나에게 어떤 현명한 조언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후배도 선배도 모두 나에게 소중한 인연이었던가.

 

후배와 함께한 저녁시간은 나에게 약 봉지를 멀리 두고도 순조롭게 잠의 나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자주 후배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얼마나 미덥고 듬직한가. 고향이 같고, 학교가 같고 살아온 시대가 비슷한,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오늘 밤 나의 꿈나라가 더 한층 다채로워질 것만 같지 않은가. 잠결에도 후배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고 전하고 싶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