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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투어

능엄주 2015. 12. 29. 22:28

작업을 놓은 관계로 시간을 유용하게 안배하지 못하고 무절제와 탕진으로 가는 경향이 우려되는 요즘이다.

토요일엔 외출을 삼가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책 <11분>  독후감을 정리하자는 계획이 있었더니 이른 아침 안과에 가 있는 나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의 전화는 어제밤 늦은 시간에도 왔고 우리는 꽤 오래 통화했다.

나는 전에 전화상담을 했던 방식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성의껏 들어주는 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화통화만으로는 친구의 스산한  마음이 모두 해소가 된 게 아닌 듯 하여 불쑥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다.


소나기가 내린다는데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나는 안과에서 진료를 마치자 곧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잔뜩 흐린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질 것처럼 찌고 무더운 날씨였다.

약속시간 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한 나는 안국역 6번 출구쪽 의자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무슨 일일까? 한 집에 살게된 아들 부부와의 불화인가. 그녀 남편과의 불협화음인가.

대강 짐작은 하면서도 몇 달 만에 궂이 나를 만나겠다는 친구의 깊은 의도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정도의 불편함이나 애로사항은 일상에서 누구나 겪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가까운 혈육의 경우에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크게 다가올 수 있는 법.


굽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쪽 곧은 자세로 활기차게 걸어오는 친구의 모습을 대하자

내 상념은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그녀를 환영했다.

 예정된 순서대로 우리는 인사동 거리로 손을 잡고 걸어갔다.


문인동지들과 즐겨 가는 한식집에서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고 우리는 수다를 야채비빔밥에 섞어 맛나게 먹었다.

무슨, 그런 놈들이 다 있어? 엄마가 뭐 무한 노동력인 줄 알아? 주말에는 지새끼 지들이 좀 볼 줄도 알아야지.

애들 셋을 찍소리 안하고 혼자 다 길렀다고. 고이헌 놈들 같으니. 잘 나왔다. 애 봐주고 그런 거 하지 말어.

나는 괜스레 허풍을 떠느라 숭늉도 마시지 못하고 붐비는 식당을 나왔다.


차마시러 가는 길에 우리는 인사동 브랜드를 거쳐가야 했다. 그게 문제였다.

하긴 언제라도 인사동 나들이에서 그 옷집 즉 말하자면 인사동 브랜드가 빠져 본 일이란 없다.

조계사 친구와도, 교회 권사인 Y와도, 그리고 내 젊은 독자와 함께 와도 그곳은 어김없이 들려가야 하는 곳이기는 했다.

마음이 진창이 돼 허둥지둥 나를 보러 인사동에 나온 친구 눈에도 삼삼오오 무리지어 들어가는 그 옷방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인사동 브랜드 그 옷방에 들어가자마자 밖엔 천둥번개가 요란 시끄러웠다.

우르르쾅! 그게 몇 차례 계속되면서 옷방은 사람들로 꽉차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으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입어보고 벗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의 친구는 핸드백을 나에게 던져놓고 누구보다도 활동적으로 넓은 매장을 가로세로 휘저으며 옷사냥에 열을 올렸다.

 

소나기는 지루했고 친구의 핸드백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아차 한 눈 팔면 순식간에 가방 떼어가는 사건사고도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여자들 옷 파는 곳에 웬 남자고객이 그리 많은가. 중년의 남자는 부부동반팀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만 젊은 층은 어딘가 수상쩍은 구석도 있었다.
나는 내 가방과 친구의 핸드백 안전만을 생각하며 양손을 불끈 쥐고서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려 안깐힘을 썼다.

 

내가 입어보고 싶은 옷들이 있다고 해도 거들떠 볼 겨를이 없었다.

고객님들은 남들이 보건 말건 맘대로 벗고 입고 난리 북새통이 벌어졌다.

우르르쾅! 하는 천둥소리에 더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우르르 쾅! 할 때마다 경쾌한 음률과 서늘함을 선사하며 소낙비는 주루루룩 쏟아졌고 인사동 일대를 삽시간에 비안개로 덮었다.


어! 좋은데 잘 어울려. 나는 단지 거울 앞에 선 친구를 향하여 그 말 한마디를 씩씩하게 복창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친구가 건져온 옷은 나의 간단명료한 품평의 말에 의하여  바구니를 한가득 채우고 남았다.
'그만해.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나는 친구가 충동구매의 허상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하기 위해 묘안을 짜내 외쳤으나 막무가내였다.

인사동 브랜드는 잘 사면 횡재요 잘 못 사면 말짱 손해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어도 친구는 이미 그 브랜드 사냥에 담뿍 취한 상태였다.


'전통차 마시러 가자'  전통의 거리 역사의 거리에 왔으니 우리 민족 고유의 차를 음미하자고.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친구의 팔을 낚아채듯 그곳을 나왔다.

화랑이며 새로 문을 연 전시회장이며 가볼 곳이 더 있었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사뭇 길어 나는 지쳐 있었다.


나무 백일홍이 활짝 피어 있고 연못과 허브향이 어우러진 아담한 정원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메리카노 한 잔 숭늉 대신 마시고 거리로 나왔다.

오늘 정말 행복했어. 잘가 영희야!  친구는 옷을 넣은 큰 가방을 흔들며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인사동 투어는 허무맹랑하게 막을 내리고 비 그친 하늘에선 뜨건 폭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친구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지하철역 구내로 내려와 나무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머니란 이름이 갖는 무한 노동력의 현대적 해석은 무엇일까. 친구는 왜 그리 분노한 것일까,

뭣에 씌인 듯이 옷을 사가지고 돌아간 친구를 생각하며 한참동안 나는 거기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희순   09-08-01 21:49
가장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라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셨군요. 그러한 친구를 둔 선생님의 친구는 참 행복한 분입니다.
     
변영희   09-08-02 08:19
아이그그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상담하려고 하는 來談者도 상담을 해주고 있는 자도 다 같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겠지요. 동류의식 아니면 同氣 同聲 感應 같은 것.
친구가 속상한 것 누군가도 늘 겪는 일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큰 바위처럼 잘 참아내고 살아요. 감사합니다 이희순 선생님.
매미우는 아침.
임재문   09-08-02 01:22
변영희 선생님 ! 또 한 밤중에 로그인해서 글 올립니다. 친구가 역시나 좋기는 합니다. 함께 기분도 풀어주고, 동조해주고 또 그의 입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 친구를 신바람나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바람나는 삶!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변영희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서라도 ㅎㅎㅎㅎㅎㅎㅎ
     
변영희   09-08-02 08:25
이른 아침 아파트 공원을 산책하고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면서  임재문 선생님 이라면 두루 신나게 잘 사실 거라는 생각입니다.
글쎄 신바람이 난건지 怒氣가 충천해서 오버한 건지 친구가 행복하다하니 일단 그 말 믿어볼 밖에요. 고맙습니다.
임병식   09-08-02 08:01
숨길것 없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그날 친구분의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신것 같은데, 충동구매를 막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군요.
늘 글방을 풍성하게 체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무더워지는 여름철,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변영희   09-08-02 08:31
임병식 선생님께서 잘 지적해 주셨어요.
또 한 가지 어제 광화문 광장 첫 개방하는 날인데 거기까지 갈 수 없던 것도 아쉬운 점이군요.
시원한 물줄기를 TV로만 보았습니다. 광화문의 시위문화는 저 만치 멀어지겠구나 그런 생각도 겹치고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여름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최복희   09-08-02 09:33
재밌는 소설 대목을 읽은 듯 합니다.
친구는 선생님 만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귀가했을 것 같군요.
앞으로도 좋은 친구라고 분명 다시 찾을 것 같습니다.
넉넉한 선생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혼자 지차철 역 구내 의자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 곁에 있고 싶군요.ㅎ
     
변영희   09-08-02 21:22
최복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친구가 사가지고 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혹 전화가 오지 않을까 걱정되었어요. 친구가 센스가 있어서 옷을 잘 고르는 것 같더라고요.무사히 하루 해를 잘 넘겼어요.싫컨 수다떨고 옷 사고 기분이 좋았으면 그걸로 된 거죠 뭐. 맨날 손주 보다가 인사동 나오기는 어디 쉬운 일인가.
김창식   09-08-03 11:36
변영희 선생님, 때론 남자에게도 수다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변영희   09-08-03 15:47
남자들 술자리가 수다 떠는 자리 아닌가요.
초등학교 동창 (남자) 수다도 시간 구분이 없답니다.
주책스러워 지는 걸까. 나이들어 입이 심심해서인가. 외로움일까. 헤아려봅니다.
말은 해야 맛이라는데 가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바구 장단.
소나기 한 줄금 내렸으면....감사합니다.
정희승   09-08-08 16:01
보통 매장에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인사동 브랜드에는 경쾌한 천상의 음악으로 대신하나 봅니다. 그렇게 옷을 사들고 가는 친구분은 혹 선녀가 아닐까요? 감정이 천상의 음조에  저절로 동조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분 그것으로나마 다소 활력을 찾았으면 합니다. 좋은 일 하셨습니다.
     
변영희   09-08-08 20:10
전화를 해볼까. 집에 잘 돌아갔나. 정신없이 사들고 간 옷들은 잘 맞나. 내가 친구에게  잘못한 건 없는가. 오늘 친구 전화가 그런 걱정들을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절대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초등학교 동창의 말. 또 다시 만나서 수다까고 맛난 것 먹자는 제의도.
선생님의 <별자리못 전설>
어제도 교보문고에 가서 보고 왔습니다. 눈에 잘띄는 곳에 진렬해 놓은 때문이기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