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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장미꽃

능엄주 2021. 5. 23. 04:53

호수공원 장미꽃

 

청량한 이른 아침 지인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호수공원 장미꽃 동산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아름답다는 말 뿐, 지인은 진자주 분홍 주홍 노랑 하양 등, 가지각색의 어여쁜 장미꽃 사진은 보내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꽃이 어찌 장미뿐이랴. 산과 들에 저 혼자 피어난 풀꽃도 나름 앙징맞고 예쁘다. 올해는 수선화 영춘화 개나리 진달래부터 시작하여 목련, 라일락, 철죽꽃, 회화나무꽃, 아까시꽃 모두가 일찍 피고 일찍 시들었다. 우리 어머니 기일이 다가올 무렵 피어나는 오동나무 꽃도 바야흐로 경부고속도로변 어딘가에서 은은한 보랏빛 봉오리를 벌고 있을 것만 같다.

 

아파트 단지에 진한 향기가 감돌았다. 향기의 주인공은 어떤 꽃보다 가장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쥐똥나무꽃이었다.  사람냄새 물씬 나는, 지극히 서민스럽고 구수해서 해마다 쥐똥나무꽃이 피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분 묘소에 한 번 가본다 하면서도 문인 단체가 함께 가는 기회를 놓쳤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동안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장미꽃 향기에 지지않을 쥐똥나무꽃 향기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람의 감성을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듯 하고, 다소곳하고 음전한, 잘난 체도 으스대지도 않는 쥐똥나무꽃 향기를 뒤로하며 바쁘게 걸어 지하철에 올랐다.

 

그렇다! 오늘은 일찍 나섰으니  병원 진료를 마치고 호수공원 장미꽃 동산으로 가보리라. 그동안 너무나 우울했고 침체 되었다. 심혈을 쏟은 작품에 원고료와 인세를 받아 빚처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는 기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교통사고 귀신에 씌여 몸도 마음도 서럽도록 아프고 아팠다. 그러니 모처럼 호수공원에 나들이를 해서 나 자신을 유쾌하게 하는 시간을 누려보면 어떨까. 해마다 열리는 호수공원의 화려 찬란한 국제꽃 박람회는 첫해에 동창 친구들과 한 번 갔을 뿐이고, 장미꽃 동산은 더러 가본 일이 있어, 아취형으로 휘어진 하니문 같은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병통病痛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묘법이 될 터였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나는 그 한 생각으로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내가 나를 배려하는 듯하여 홀로 흐뭇헤 했다.  무슨 꽃이든 꽃은 언제나 인간에게 즐거움과 미소, 희망을 안겨준다. 선천적 악마가 아닌 다음에야 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병원을 빠져 나왔다. 아! 그러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핑! 하고 예의 어지러움증이 엄습했다. 발걸음이 휘청한다. 오늘의 치료가 만족하다고 느낀 것은 순간의 착각인가. 가까스로 버스정류장에 이르자 고개를 들어 버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호수공원 방향으로 가는 버스 시간도 물론 전광판에 떴다.

 

가긴 어딜 가. 빨리 집으로 가! 치료과정에도 또 다른 아픔이 따른다는 걸 왜 몰라?

장미꽃 구경도 건강한 사람 몫이다. 나는 아니야. 집에가서 미역죽 한 보시기 먹고 편안하게 쉬어 주라. 건강을 잃으면 만사휴의萬事休矣라는 것 잘 알잖아. 독백을 흘리며 버스에 오르자 당연히 나는 눈을 감았다. 울분을 억지로 참는것이다. 아무 것도 내 임의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슬펐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여전히 집을 나설 때처럼 동일한 향기가 진동했다. 동서사방에 넘치는 게 쥐똥나무 꽃 향기였다. 오며가며 수월하게 누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오월의 대표적 향기였다. 나는 시골집의 옛 어르신을 만난 것처럼  난데 없이 기쁨이 폭발했다. 오! 그래! 바로 너였구나. 너밖에 없어! 감격해 마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참동안 쥐똥나무꽃 향기를 찬양 음미했다. 꽃 모양새가 오종종하고, 꽃을  피운 자리가 고급주택의 우아한 정원이 아닌, 겨우 울타리가의 허술한 곳이어서 더욱 애달픈, 그 완벽한 향기에 취해 마냥 서 있었다. '그리움이 희망으로' 라는 고 노무현 서거 12 주년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내걸린 거리에서도 잠시 눈길을 주었지만 쥐똥나무 꽃향기와 그리움은 나에게 각별했다.

 

그리움을 품을 수 있고, 그 그리움이 사랑으로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예감에 안도했던가.  내 마음은 비로소  평화를 회복한 듯했다. 호수공원 장미꽃 동산은 다른 내일로 기약하며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오직 휴식을 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