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 수준
재앙 수준
5월 18일 신경외과 진료 후 약 처방을 받았다. D.R 말씀은 뇌 혈관이 좀 막힌 것 같고 충격을 받아 놀랐으므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사고 환자라 병원 구내 약국 말고 외래 약국에서 약을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셔틀 버스를 타고 내려서 근처를 둘러보았으나 약국이 보이지 않았다. 늦봄 햇살이 무척이나 따거운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20분 정도 걸었을 때 건물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약국 간판이 보였다.
"이런 약은 없는데요. 큰 길에 나가셔서 대각선으로 보면 성모약국이 보일 겁니다. 거기 가시면 이 약이 있을 것 같아요."
대체 이런 약이 무엇이길래 없다고 하는가. 나는 다시 땡볕을 걸어갔다. 걸음이 내 걸음이 아니다. 어쩌자고 이렇게 걸음걸이가 불안할 만큼 마구 몸이 휘둘리는지 참으로 기이하고 한심스러웠다.
약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나는 그 약을 먹지 않았다. 약 먹기가 그냥 겁이 났다. 정신 없이 곯아떨어져 잠을 잤고. 19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했다. 바쁘다, 아프다, 라는 핑계로 기실 새벽에 기도하고 경전을 읽는 것은 꾸준히 했지만 조계사는 코로나 때문에도 잘 가지 않았다. 아무리 날라리 신도라도 오늘 만큼은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오색 연등이 500여 년 된 회화나무 사이로 휘황하게 드리워진, 대웅전 앞 큰 마당에서 치러지는 부처님 오신 날 봉축식에는 참석하고 싶었다. 아침 식사 후 마치 나를 지켜주는 국방군國防軍인양 어제 사 가지고 온 약 한 봉지를 먹고 집을 나섰다.
조계사가 가까워지자 거리는 인파로 북적댔다. 교통순경이 등장해서 조계사로 가는 차량과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인파를 뚫고 도량 가운데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제일 먼저 향을 피어 올리고 탑을 3번 돌면서 산란한 몸과 마음을 잠재웠다. 그런 다음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돌 의자에 끼어 앉았다. 봉축 법회는 법당 뜰 어디에서도 잘 볼 수가 있었다. 오랜 만에 듣는 큰 스님 법문이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귀에 쏙 쏙 들어왔다. 특이한 것은 이씨 조선 태종 때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도첩제를 폐지, 출가의 길을 막고 전국의 사찰을 대폭 폐쇄한 역사적인 사실이 화면에 떴다. 결국은 일제에게 나라를 뺏기는 것으로 마감된 이조 500년이었다. 조계사 마당을 내집 처럼 뛰어다니는 선재 어린이 집 소개도 참신했다. 코로나19는 인간이 지은 업때문이라는, 불법의 자비와 연기緣機를 더욱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코로나 19로 전처럼 사찰에 온 모든 대중에게 주는, 조계사 표 맛좋은 떡 선물도 없는 조촐한 봉축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졸음이 덮쳐 내릴 데서 못 내리는 실수를 연발했다. 간 길을 되돌아와 다시 탔지만 그야말로 눈 깜박할 찰나에 또다시 졸아 엉뚱한 곳에 이르러 갈팡질팡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아무리 피곤해도 나는 지하철을 타고다니면서 졸아본 일이 거의 없다. 졸면서 내릴 곳에 내리지 않고 내쳐 가 본 경험도 없다. 지하철에서 졸기에는 내 정신은 늘 시퍼렇게 눈뜨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좀 별났다. 완전 내 정신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지하철엔 승객이 차고 넘쳤다. 며칠 동안 비오고 습하던 날씨가 오늘따라 푸른 하늘과 산들바람이 불어 누구에게나 외출의 유혹을 느낄수 있을 만큼 환상적이었으니까.
인사불성으로 졸은 때문에 예상 시간 보다 훨씬 늦어 집에 돌아온 나는 미역 죽을 한 보시기 먹고 곧바로 누웠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던가. 무슨 기척에 깨어나니 밤 12시 40분이었다. 속이 쓰렸고, 오른 쪽 등줄기에 열이 뜨끈뜨끈 나면서 팍팍 쑤셨다. 통증이 머리에서 등허리로 옮겨갔나? 이 또 무슨 일인가? 병원에 다니며 치료받으면 받는대로 오리무중이 아닌가. 나는 한 밤중 격렬한 통증에 황당했다. 머리도 깨지게 아팠다. 급기야 시야가 흐려지면서 글자가 안 보이고, 귀도 먹먹, 가히 재앙수준이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 아닌가 싶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졸다가 어디까지 갈지 앞으로가 더 문제 될 것 같았다. 병원 가는 것, 약 먹는 것, 각별히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정황이었다.
한 밤중에 홀연 도깨비처럼 잠에서 깨어나 보니 등과 머리 아프고, 속 쓰리고 배 고프고 이지가지였지만 글로써 내 심신의 복잡한 상태를 표출하고 있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사연! 나만의 아픔을 내가 나에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심을 해야 한다. 병원 출입 땡! 종치고, 독약에 버금가는 약 몽땅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로. 병원마다, 科마다, 의사마다, 다른 처방, 다른 치료법, 다른 진단, 그만 내가 상傷해서 나가떨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고쳐졌나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아 계속 헤매고 있으니 무섭다. 장차 가공할 일이 벌어질 지 누가 아는가.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더 큰 재앙이 다가오기 전에 각성이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안정되면 내 식대로 펼쳐나가자.
지하철에서 인사불성으로 졸다가 평소에 가지 않던 생소한 지점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추후가 두렵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죽는 방법이다. 어쨋든 지금 죽을 수는 없다. 이런 무시무시한 혼란 또한 내 스스로 잠재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