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물
분실물
아파트 단지의 키작은 나무위에 흰눈이 떡고물처럼 얹혀 있었다. 어제 비가 온종일 내렸는데 웬 눈? 나는 눈을 쳐다보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요즘 처리할 일이 산 같이 쌓여있어 허둥거리다가 날자 가는 것도 그만 잊었던가. 오늘이 마감인 걸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
춥다고,바람분다고 미룰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 됐든 생각날 때 즉각 해결해야하는데 미루면 꼭 사단이 생긴다.
ATM은 그 시간 이미 만원이었다. 한동안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내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맡았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나에게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딱, 잘라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은 나의 성질머리때문인가.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무척 곤혹스러웠다. 이일을 어쩌지?
내 일만으로도 지쳐있으니까. 나는 새로운 일이 버거웠던가. 평소에 하던대로 그냥 지내가면 별탈없을 것을.
아침해가 화사하게 H중학교 건물 전면에 쏟아졌다. 날씨는 쾌청이었다. 이제라도 내 뜻을 밝혀야 하는 게 옳은가.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과 돈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면 쉬고, 없으면 안 쓰고, 나는 제대로 길들여져 살아온 것이었다. 굳이 내 삶 자체가 과부하인데다가 더 무게를 보탤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의 내 생활지침은 수뢰둔水雷屯이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수산건, 택수곤, 중수감 그이상으로 염려스러웠다. 무슨 일이 발발하려는가. 불안한 마음 그대로 은행에는 갔다.
기어코 분실물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곳에 안경을 벗어놓고 그냥 나온 걸 깜빡했다. 추운데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니 마스크를 뚫고 안경을 덮치는 서리? 입김때문이었다. 숫자가 안 보였다. 생각하면 그놈의 코로나19가 직접 원인이다. 코로나 이게 가나오나 아주 꼴통이다. 매사 장애가 된다. 글자를 확인하려고 잠시 벗은 게 그만 분실로 이어진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달려갔지만 이미 그 자리에 내 안경은 없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도 몰랐다. 집에 와서 보니 벗어놓을 안경이 없는 것이다. 집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무관심했던가.
왜 가져가? 자기 것도 아니면서? 비싼 선 그라스도 아닌데? 어리석은 도둑놈이었다. 도수度數도 안 맞는 남의 안경을 가져다 어디에 사용하려고? 불쾌하다. 어느 분 이야기가 생각난다. 여행중에 생긴 일이라고 한다.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렸단다. 동행이 함께 있어도 그걸 모르고 내려서보니, 전차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갔다나. 그런데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전화가 왔다고했다. 그 가방에는 여행중인 그 사람의 모든 소지품이 몽땅 들어 있었단다. 그 안에 든 물건 어느 것도 변함이 없는 상태 그대로 가방을 찾아왔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그 가방 속에 카드와 적잖은 돈도 있을 법 하지 않은가.
남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수뢰둔은 오늘의 내 일과를 꿰뚫은 것인데 내가 방심했다. 내 안경을 갖고 간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던가. 그걸 어디다 사용하려고? 몹시 불쾌했지만 잃어버린 자의 불찰이라 하고 체념한다.
한 가지만 집중하자. 써놓은 작품 달라는 곳에 다 내주어 재고가 동났다. 그러니 내 일만 하자. 내 일만으로도 나는 늘 힘겹다. 한가한 곳, 적막한 곳에 가서 내 방식대로 편안하게 안주하고 몰입하고 싶다. 타인의 눈, 평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를! 몰두의ㅡ 공간, 나에게는 다만 방 한칸이 필요하다. 쉬면서 놀면서 노래부르면서, 사각의 빈 방에 책상 하나, 달력 하나 벽에 걸고!
제발 물먹은 솜처럼 지쳐서, 막차타러 갈 사람처럼 분주떨다가 분실물 사고나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