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주 2021. 2. 23. 15:17

봄바람

 

틀림 없는 ㅡ봄바람이었다. 햇살 눈부시고 하늘은 높았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이른아침,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도 지나갔다. 개구리가 뛰어나온다는 경칩이 다가오지만 이제 겨울은 갔다. 갈수밖에 없다. 우주의 질서이니까. 우주의 질서도 모르는 코로나19 때문에 너도 나도 마스크를 쓴 채 봄을 맞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생동감으로 넘치고 희망적이다. 새로운 계획에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쥐똥나무였다.  가끔 우체국 가는 길에 마주치는 쥐똥나무 군락. 오래전 철망 울타리에 붙여서 누군가가 쥐똥나무를 그곳에 심어놓은 것일까. 가로수는 아니더라도 매혹적인 향기 하나로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하는 쥐똥나무!  쥐똥나무 하얀 꽃이 오소소하고 앙징맞은 모습으로 피어날 때면,  어린 손녀를 자전거뒤에 태우고 들길을 달리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 한 사람의 지극히 서민적이고도 진솔한 향훈을 그리워한다. 사람에게도 쥐똥나무 꽃 향기 못지않은 향기가 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봄이었다.

 

나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 철망 울타리 그 안 쭉에  3M의 높이로 햇볕을 차단한 하얀 철판 벽! 쥐똥나무는 담밖으로 밀려나 천덕구리로 전락한 것. 그 위에 지난 가을에 떨어진 플러터너스의 넓직한 잎새들이 쥐똥나무의 여린 가지를 누르고 잔뜩 덮여있어 내 숨결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쥐똥나무는 죽음의 환경에 방치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햇볕과 바람, 수분은 나무에게도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어쩌자고 사람, 저들만 잘 살겠다고 철판으로 햇볕을 차단한단 말인가. 철망 울타리로 기어오르며  저혼자 피어나는 나팔꽃도 올 해 꽃을 볼 수 있을지 막연하다. 사람처럼 그들도 태양 빛을 받아 성장하고 꽃 피울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늘 속에서 마구 가지가 꺾이고 노숙인처럼 볼품 없이 된 쥐똥나무가 가엾다. 우체국을 오고가면서 그 꽃떨기를 바라보며 향기를 즐겼는데, 올핸 제대로 꽃이나 피우려는지 모르겠다.

 

나는 미국에, 캐나다에 갔을 때 경이로웠다. 길거리 나무와 화초를 잘 가꿔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일. 사람들만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그들 풀 나무 식물 권속들도 적어도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이상,  충분히 제몫을 다하듯, 당당하게 아름다움을 과시했던 것이다. 보는 이들에게 조화와 안정을 누리게 했고, 살아있음을 환희하고 감사하게 했다.  

 

우체국 가는 길의 쥐똥나무가 불운을 만난 것, 그들의 생장과 꽃 피움에 가장 절실한 태양의 열기, 바람의 순환을 거부당한 것이 아닌가. 식물도 인간과 같이 조물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그 장소에 나온 것일 터이다. 처참하게 변한 쥐똥나무의 환경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 혹 있을까.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 역시,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밖인 것,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트 화단에서 그나마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 하늘에서 내려주는 밝고 따뜻한 햇살 정도는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있지 않는가. 주민센터에 그 주변의 나무와 화초를 돌보는, 일자리 창출도 되는, 부서를 신설하면 어떨까. 어찌 이 터전이 인간만의 공간이랴.

 

풀밭에 지천으로 돋아난 민들레조차도, 꺼실하고 영양실조처럼 아시시한 모양새가 안타깝다. 출신성분에 따라 금수저 흙수저로 분류되는 인간처럼 식물도 애초 씨앗이 어디에 떨어졌는가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예외가 아닐 것. 오늘의 쥐똥나무는 누구 한 사람 눈여겨 보아주지 않고, 발길에 채이고 홀대받는 것처럼 보인다. 먹고 살기 힘든데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럴 수도 있다. 풀 나무 그들도 우리와 함께 공존공생해야하는 우주 가족, 공동체가 아닌가.  

 

우체국을 가며오며 쥐똥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을 보려고, 일부러 먼 곳으로 돌아서 가곤 했다. 사람만 귀중한 생명인가. 저들만 잘 살으라고 지구가 존재하는가. 신축년 봄은 왔는데 쥐똥나무들에게는 까칠한 봄이 되었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동식물 모두를 사랑하고 가꾸는 마음은 어디로 부터 오는가. 그런 시절이 오기는 올까. 봄바람 싱그러운 날,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