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그 시절
80년대 초였다고 기억한다.
각 신문사에서는 소위 문화센터를 개설하였다. 대학 강단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 시인들을 초빙하여 시, 소설, 수필 등 문학 방면 뿐 아니라, 서예, 그림, 음악, 고전무용, 외국어 등 각 분야의 여러 강좌가 3개월 과정으로 반복해서 열렸다.
문화센터 강좌는 결혼하여 아이 낳아 키우고 살림하느라 코가 빠진 장안의 많은 주부들을 유혹했다. 끝없이 부지런을 떨어도 끝이 안 나는 가정사에만 머물지 말고 넓은 세계로 나오라, 전업주부의 실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줄 아느냐고, 조간 석간 할 것 없이 현란한 광고가 우리들을 부추겼다.
우리들(나를 포함한 대다수 주부)은 귀가 번쩍 뜨였다. 대개는 학창시절 시를 쓴답시고 달밤에 툇마루에 나앉아 하염없이 먼 허공을 바라보았거나, 차라리 시 대신 달 밝은 밤을 노래 부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할지라도 그들 가슴속에는 시인의 꿈, 작가의 꿈이 내밀하게 숨겨져 있었던지 모른다.
J 문화센터, D 문화센터 등을 두루 섭렵하다가 이를테면 그게 뭐 살롱강의라나, 이름을 붙이면 그랬는데, 문학만 강의하는 곳으로 몰려간 적이 있었다. 개인지도가 가능한, 일대일로 저명인사의 특별강의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작가 지망생들의 집합소나 다를 바 없었는데, 정확히 말한다면 문화센터 강의보다 그 질이나 양에 있어서 그다지 우월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올만한 사람들이 왔고, 비록 늦었지만 문학에의 꿈을 이루어 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젊고 예쁜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잠시나마 벗어낫다는 데 대해서 우리들의 심신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우리는 집안일을 할 때보다도 더 치열하게, 더 극성스럽게 강의에 몰두했다. 강사로 나온 김동리, 손소희, 황명, 조경희,민희식 등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냥 강의로만 끝냈다. 그러나 성r기조 선생님은 반드시 숙제를 해오도록 독려했다. 삼십 명의 수강생들은 짧은 시나, 단문, 즉 수필을 써 냈고, 개중에 한 두 사람이 소설을 써내곤 했다. 나는 우연일지 다행일지 그 한 두 사람 중에 속했는데 나는 단번에 성기조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인정받는 계기와 맞닥뜨려지게 되었다.
여러 말이 필요 없게 된 사연이었다. 성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소설 <동창회 소묘(素描)>원고를 곧바로 선생님이 발행하는 잡지 <시와 시론>에 게재하여 나로 하여금 일약 등단의 경계선을 넘게 해주셨다.
선생님께서“이만하면 됐다!”하신 말씀에 고무되었고, 나는 내 작품에 자신감이 있거나 흡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문화센터나 살롱강의에 나오기 이전부터 신춘문예를 목표로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습작을 했고, 20대 초에 작가 수업 차 당시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잘 나가는 부부 작가의 집에 몇 년 기숙한 일도 있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성 선생님과 큰 인연은 이렇게 성립되었다.
<시와 시론>에서 <문예운동>으로 이름이 바뀐 문예지가 나의 등단지가 되었으며, 나는 그에 힘입어 소설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회고해 보면 30여 년 전 순진한 그 시절이 무한 그립다. 그 나이,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조만간 나는 영원한 미남자 선생님을 뵈러 충정로로 나가야 할 것 같다.
“그 때 제 모습, 제 글을 이야기 해 주세요!”
이렇게 선생님을 졸라볼 수 있을까. 벌써부터 나는 마음이 설렌다.
<수필시대>59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