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는 일
빚 갚는 일
돈 빚 갚는 일 뿐 아니라 진실로 마음의 빚 갚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나는 가까운 동료의 문학상 시상식에 갔다. 가기 전에 생각이 많았다. 왜냐하면 전날 밤 동료 작가의 희곡집을 읽느라고 거의 밤을 새다싶이 했기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내용으로 그 문장이, 단어 하나 하나가 얼마나 기발하고 팡팡 튀는지 거의 몰입상태로 빠져들어갔다. 이런 작가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날이 새는 것도 모른 채 정독했다. 새벽빛이 창문에 부옇게 어려있었다.
잠을 자고 싶은데 낮동안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 일이 많다기보다 내가 얼른 얼른 처리하지 못하는 몸과 마음의 둔함 때문이었다. 책상에 앉아 졸다가 깜짝 놀라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웬걸. 나는 내려야하는 역보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렸다. 깜박 졸은 게 화근이었다. 경기도 주민인 나는 평소에도 서울특별시 지리에 캄캄해서 길고 아득히 높은 9호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 내리락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지각사태가 벌어졌다.
꽃바구니, 화환 하나 우편으로 발송하는 방법도 있고, 그곳에 가는 사람 편에 부탁하는 방법도 있는데 나는 융통성이 없나? 얼굴을 꼭 봐야하는 이유라도 있어? 잠을 못자면 심신이 혼돈. 사고가 엉망으로 뒤틀리는 일이 벌어지는데? 여튼 택시까지 갈아타면서 시상식 장소에 도착했다. 20분 지각이었다.
여고 시절. 가족과 떨어져 나 혼자 친구집에 기숙했다. 하숙비 한 푼 낼 수 없는 처지였으나 5,6개월 동안 나는 친구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고교과정을 마쳤다. 친구집에 머물 때가 나는 늘 사찰계 형사의 감시를 받는 입장에서 자유로웠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빚쟁이들의 부대낌에서 면할 수가 있어 더욱 감사했다. 그게 내 어린 마음에 큰 마음의 빚으로 남게 되었던가.
서울에 올라와 취직을 했지만 나는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동생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어 그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결혼한 후에도 친구에게 고마움을 갚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박봉을 쪼개 적은 금액을 저축하기 시작했다. 근 20여년에 걸쳐서 내가 목표로 한 큰 돈?이 모아졌다. 그때서야 친구 어머님을 찾아뵙고 소녀시절의 심적 물적 부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다.
오늘 동료작가의 깊은 우정에 보답한다는 그런 의미였을까? 무리한 외출이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밤새 앓았다. 서울특별시에 한 번씩 출입할 때마다 나는 사소한 곤경에 까무라친다. 지하철을 세번씩이나 환승하는 과정에서 내 허약한 허리뼈가 삐그덕거렸고, 빨리 걷고 싶어도 젊은이들 물결을 앞지르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늘 기도한다. 나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끼친 모든 이들에게 보답하고 하늘나라갈 때 당당하자고. 그게 혈육이든 지인이든 추호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서는 하늘 길이 온전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다. 세수할 엄두를 못내고 허둥지둥 꿈나라로 내달렸다가 2020년 9월 23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어 나는 감사하다. 좋은 하루! 빛나는 하루가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