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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소식

능엄주 2020. 9. 19. 21:16

슬픈 소식

 

젊은 날 40이 채 안된 동창친구가 갑자기 타계했을 때 우리는 할말을 잊었다. 너무나 엄청나서 믿기지 않았다.  하얀 국화꽃 속에서 웃고있는 친구의 얼굴은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은 현실이었다. 문상간 친구들은 친구의 어린 아들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만 입이 붙어버린 것이다.

 

살다보니 그와 비슷한 일은 더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었다. 죽음은 젊고 늙고를 떠나 항시 우리 곁에  있다는 말이 옳았다. 평소에 건강했던,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내부모와 형제들이 사고로, 병으로 하나 둘 내곁을 떠나갔다. 어려서부터 골골해서 약단지를 붙들고 살았던 나는 지상에 있는데 그들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허전하고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인연을 두고 한탄할 겨를도 없이 내 친 혈육외에 소녀시절의 절친했던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가는 비극이 일어났다. 삶이란 본래 정처가 없는 것인가. 살았다해도 살은 것 같지 않은 시간이 무수히 흘러갔다.  '우리가 가야 할 곳, 가는 길은 슬픔만, 기쁨만 아니라는 롱펠로우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죽음에서 초연할 수는 없었다. 생사를 스스로 주관할 수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일까. 그저 덤덤히 세월에  떠밀려 예까지 이른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또 부음을 들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65세 이상의 고령자 사망율이 높아서는 아니었다고 한다. 위암이었다고 했다. 문상도 갈 수 없는 코로나 와중이었다. 나는 늦게서야  K의 죽음을 들었다. 그는 매우 건강했고 쾌활했다. 짖궂을만큼 장난끼가 많은, 대학원 졸업여행에서 시종 모든 동학들에게 폭소를 터뜨리게 하던 장본인, 분위기메이커였다. 평생에 처음, 최고로 즐거운 밤이었다. 풋풋한 여고시절 한때를 제쳐놓고, 내가 그렇게 명랑한 웃음을 웃어본 건 순전히  K동학의 재치와 유머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위암 따위로 생명을 잃다니 어이가 없다. 남자 나이로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K였다.

 

평소 과 대표보다 더 우리를 선도하고 봉사하던 K의 단짝 친구 S女에게서  K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는 일주일 여 시름거리고 앓았다. 슬픔이 극에 달했다. 수 년 전 K는 내 책을 읽고 그렇게 고생을 했느냐고 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남자가 울긴 왜 울어? 소설이 뭐 논픽션인가.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이 다 존재하는데.  나는 하 슬픈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가 나에게, 전화로 통곡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알 수 없는 전율을 경험했다. 내 소설이 남자를 울리다니~ 나는 감동했다. 그가 조계사에 올 때 나에게 점심을 사주겠다고 했다. 졸업 후 성지순례 모임에서 어쩌다 한번씩 얼굴을 보는 정도였는데 그 울림의 파장은 크게 다가왔다. 조계사 점심은 고사하고 최근 몇달은 카톡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내도 답이 오지 않아 궁금하던 차에 들려온 슬픈 소식이었다.

 

진실로 심지가 통하는 아까운 동지를 잃은 기분이다. 바보같이 암에 걸리다니! 겉모습은 더할 수 없이 건강했는데 어떻게 죽기까지 한단 말인가. 백아와 종자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의기가 투합하는, 멀리 있어도 知音이 아니었던가. 내 소설을 읽고 엉엉 울어줄 수 있는 그가  경자년 가을에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장가계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 사이에서 웃고 섰는 그의 모습,  모든 이들을 즐겁게 이끌어주던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