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희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
판형 140/210, 212쪽 가격 13,000원
ISBN 979-11-90526-17-3(03810) 발행일 2020년 7월 31일 도서출판 도화
좁은 인과관계를 넘어선 광대무변의 세계!
이 소설은
직지소설문학상, 한국문학인상, 손소희 문학상 등을 수상한 변영희 작가가 새롭게 펴내는 작품집이다. 8편의 단편을 묶은 『열일곱의 신세계』는 6·25전쟁 때부터 현재까지의 폭넓은 시기를 넘나드는 인물들의 사연이 절절하게 녹아있으면서도, 좁은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보여준다.
「아까시꽃의 비원」은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능력 없는 남편에 의지해 아이들을 키우며 아까시꽃을 따먹어야 하는 여자의 남루한 일상을 아까시꽃 향기로 피워 올린 작품이다, 세 아이를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여자의 먼 피안을 바라보는 동공이 쉽게 잊히지 않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세월로서의 삶을 살아온 여자의 시간을 곡진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연인의 셈법」은 몹쓸 종양으로 며느리를 잃은 화자의 절통한 심정이 뼈를 깎아내리는 언어로 예리하게 폐부를 찌르면서도, 그 언어의 표층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연에의 셈법을 포착하고 육화하는 방식은 남다르다. 그 남다름은 궁극적으로 시대정신과의 조응 속에서 생성된 것이리라. 그래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넘어서서 의학이나 병원에 관한 강렬한 현실 비판으로도 읽힌다.
「소울 메이트」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다니는 딸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고봉산을 함께 오르는 혜영은 딸이 이곳에서 남자를 만나 시집이나 갔으면 싶다. 복통 때문에 단식원에 들어간 혜영을 기어코 끄집어 올린 것은 꿈에서 전생의 인연을 만났다는 딸의 성화였다. 산의 사찰에서 만난 주지 스님으로부터 삼국시대 설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보이차를 석 잔째 비웠을 때 하늘의 별과 달 구름, 산과 바다, 바람과 북소리를 거느리고 온 한 남자를 만난다. 딸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소올 메이트’이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그러나 가능성이 많은 꿈에서 상징과 은유의 실마리를 얻어 자신이 가진 열망과 목표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구원의 성소」는 인터넷 시니어 기자로 갓 들어간 혜영은 곧 청와대 관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상념에 잠긴다. 오일쇼크 무렵 빚보증을 선 남편이 사라진 후 시골로 숨어들어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며 살던 시절,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타서 청와대에 들어가 영부인을 만나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그 당시 그녀가 아이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았던 개울이 그립다. 그곳은 삶의 번뇌를 씻고 해탈의 기미를 일깨워주던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관람 셔틀버스가 청와대 후문으로 다가가자 혜영의 눈앞에 불현듯 산촌 시절, 작은 위로이며 구원의 성소였던 개울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회상과 반추로 이루어진 이 기억의 순례는 현재와 과거가 나누는 대화이자, 나이가 들어 시니어 기자가 된 육체가 과거 반짝이는 햇빛을 튕기며 맑게 흐르던 개울물에 투영된 자신의 젊은 표정을 되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화려한 초대」는 건설회사 자재 관리 책임자인 남편을 따라 낯선 산골로 와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화자이다. 할머니와 손주 둘이 있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여자는 1977년 그해 극심한 가뭄으로 물 고초를 겪지만 느닷없는 집중호우로 물바다가 된 마을에서 용케 빠져나온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산에 올라간 손자 동진이는 겨우 발견되어 보육원에 보내졌는데 미국으로 입양된다. 그 동진이가 금의환향해 고향에 공장을 짓고 초대하자 여자는 기꺼이 응한다. 그곳은 여자가 처음 살아본 산골이었고 그만큼 그녀의 영혼에 각인된 많은 기억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기억을 고집스럽게 소환한 작가는 무당벌레, 산딸기, 개울가, 작은 물레방아, 펌프, 물 양동이 같은 표정들을 살가우면서도 고통스럽게 우리 앞에 소환하고 있다.
「꽃밭 방공호」는 집 마당에 꽃밭을 없애버리고 만든 방공호를 통해 굴곡진 시대를 살아가는 군상들의 모습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방공호의 협소한 공간에서 봉희가 겪은 공포는 유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면서도, 그런 공포를 밑자락에 깔면서도 봉희의 집 방공호와 만석이 집 방공호의 묘사 같은 것을 통해 그 시절을 훨씬 부피감 있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인 순간의 역사적인 장면을 방공호에 에두르는 작가의 솜씨는 생득적이다.
「열일곱의 신세계」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인애가 잠자는 것도 끼니 챙기는 것도 잊고 논문에 매달린 것을 본 딸은 당장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극성을 떨어 기어이 캐나다로 보내려고 한다. 어릴 때 수양딸로 보내야 수명이 길어진다며 한사코 자신을 보내려는 부모님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으며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인애는 나는 쉽게 죽지 않는다며 한사코 여행을 뿌리치지만 딸은 기어코 그녀를 비행기에 태운다. 비행기를 타고서야 인애는 캐나다 여행이 그녀에게 ‘이것이 괴로움이요, 이것은 괴로움이 쌓임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요, 이것은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이라는 미묘한 법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 같다. 비행기에서 새날이 밝아오자 인애는 자신을 둘러싼 검은 장막이 일시에 걷히고 상쾌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열일곱 살 인애가 만났던 영화 자이언트의 주제곡이 흘러나온다. 어떤 미묘한 법을 체험하고 다시 만나는 열일곱은 호기심과 순정함이 뒤섞인 청춘기의 영혼이면서도, 자신의 전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발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움의 시원」은 충북 옥천의 정지용 문학관과 생가 탐방에 참가한 해연은 여고시절에 자신을 따라다니던 찬영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찬영이 일방적으로 보낸 편지 때문에 훈육주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언니, 가까운 친척이 납북되자 그의 생사를 찾아 나선 큰형마저 소식이 두절된 찬영, 그런 그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루비 다실과 돈암동 태극당과 같은 기억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힌 채 정지용 시인의 손을 잡고 그의 시 향수를 읊조리는 인애는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소년 찬영이 뛰어놀았을 넓은 들 동쪽 끝으로 끝없이 흐르는 무량한 그리움의 시원을 발견한다.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그 어떤 심연의 그리움은 응축된 힘을 내장하고 있는 자신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데, 그런 모습과 시간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서술해 내면의 울림이 깊다.
『열일곱의 신세계』의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 변주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은 풍요로운 기억의 환유적 소설쓰기로 나타난다. 우리 사회가 온통 가치 변환적인 유용성을 지향하고 있는 이때 변영희 작가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집요하게 들려주는 지난날의 가슴 저미는 실패와 좌절과 회한과 그리움의 작고 큰 개울은 어느덧 도도한 장강의 물결로 어우러져 인과관계를 넘어선 광대무변의 세계로 흐르고 있다.
작가가 가진 과거 혹은 기억에의 무게만으로도 능히 이 변화무쌍한 시대의 감각에 맞설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열일곱의 신세계』는 증명한다.
목차
작가의 말
아까시꽃의 비원
자연인의 셈법-마음을 비우고 창자를 비우고
소울 메이트
구원의 성소
화려한 초대
꽃밭 방공호
열일곱의 신세계
그리움의 시원(始源)
본문 속으로
그녀는 찬물에 술렁술렁 아까시꽃을 헹구고 밀가루 반죽을 했다. 보자기를 깔고 솥에 쪄내니 냄새가 그럴듯하다. 그녀는 아까시꽃으로 떡을 해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다. 향긋한 아까시꽃 떡은 순전히 민석이 덕분이었다. 민석이는 유아원 간식 당번일 때 간식을 준비해가지 못해서 등원을 거부당했지 않은가. 아까시꽃 떡에는 민석이의 눈물과 설움이 담겨 있었다. (「아까시꽃의 비원」 중에서)
할아버지가 따라 주는 술잔을 받아 올린 다음 승윤은 엄마에게 맘 속으로 희망을 전한다. 승윤은 진즉부터 의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던가.
“엄마! 배고프면 언제든지 집에 와. 엄마도 우리와 함께 피자를 먹으면 돼!”
승하의 허스키한 음성이 밤의 정적을 깼다. 어디선가 ‘밥상이 약상이여’ 하는 자연인 해관 선생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현관문을 닫았다. 온 집안에 한밤의 고요가 내려앉는다. 하얀 재를 날리며 위로 올라가는 소지를 따라 가족 모두의 슬픔이 점점이 흩어져갔다. (「자연인의 셈법」 중에서)
개울은 해영이네 아이들이 귀가하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마음 껏 놀 수 있는 놀이터요, 발도 씻고 간이 목욕도 할 수 있는 자연의 샤워장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개울가에는 냉이며 강아지풀 질경이 망초가 무성하고 그 사이로 돌미나리가 소담하게 어우러졌다. 해영은 돌미나리를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 돌미나리는 불그스름한 이파리를 활짝 펼치고 옆으로 퍼진 것이 줄기가 제법 실했다. 윗대만 잘라 끓는 물에 데쳐서 초고추장에 버무리면 이 마을에 오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희한한 입맛이 살아나곤 하였다. 입맛은 곧 해영에게 살맛이었고 돌미나리는 자르면 자를수록 금세 새순이 올라왔다. (「구원의 성소」 중에서)
아버지는 일꾼을 불러 꽃밭을 뭉개고 방공호를 판 것이다. 큰언니 말로는 태평양에 큰 전쟁이 일어나서 일본 땅에 비행기가 공중폭격을 한다던가. 꽃이나 보고 즐길 때가 아니라는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아버지에게 밤손님들이 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일본 순사의 큰 덩치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때 뭉갠 것은 꽃밭뿐이 아니었다. 일상의 질서와 가정의 평화도 꽃밭과 함께 뭉개져 버렸다. 봉희의 배앓이도 그즈음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봉숭아꽃을 비롯 모든 식물 가족도 압사를 당한 것이다. (「꽃밭 방공호」 중에서)
열일곱 살 인애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 테일러, 록 허드슨, 텍사스의 거부장자 글엔 매카시로 분장한 제임스 딘을 처음 만났다. 사는 집의 사방 벽과 자신의 방, 그녀의 과목 노트마다 제임스 딘 사진을 부착하고 황홀한 꿈에 젖어 지냈다. 달 밝은 밤이면 그녀의 방 창문 아래서 C고 남학생들이 자이언트 주제곡을 휘파람으로 합창했다. ‘내 사랑 텍사스 아름다운 텍사스’가 인애의 삶 속에 흥건히 넘쳐흘렀다.
광활한 땅 자이언트와 마주친 것일까. 제임스 딘을 열애하던 열일곱 그 시절로 회귀한 것일까. ‘자이언트’의 경쾌한 음률과, 시니컬한 제임스 딘의 환영 속에 그녀의 심혼은 종잡을 수 없는 열일곱의 신세계로 붕붕 떠오르고 있었다. (「열일곱의 신세계」 중에서)
추천의 글
변영희 작가의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는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인물들의 아픔이 절절하게 녹아있는 그 시절의 풍경을 최대한 풍부한 에피소드를 통해 진정성 있게 그리고 있다. 6·25 때부터 현재까지의 폭넓은 시기를 넘나드는 인물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 온 심중의 말을 진중하면서도 때로는 경구 같은 의미로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일상적인 체험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면서도 삶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작가의 능력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서 발현되는 작가의 시선은 현세의 자아와 타자, 그 좁은 인과관계를 넘어선 광대무변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김성달(소설가)
작가의 말
사는 일은 곧 소울 메이트, 그리움의 시원같은 첫 사랑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고, 어제로 흘러간 전생을 기억해내는 것이었다. 자연인의 셈법 같은 지혜를 발견하면서 죽음의 비극도 세월 지나고 나면 한 줌 재가 되는 허무와 슬픔을 토로한다.
저자소개
청주시 남주동에서 태어났다. 1984년 『문예운동』에 「동창회 소묘」 발표 이후 장편소설 3부작 『마흔넷의 반란』 『황홀한 외출』『오년 후』『무심천에서 꽃 핀 사랑』을 출간했다.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입실 파티』『매지리에서 꿈꾸다』 『모정 삼만리』가 있다. 수필집 『몰두의 단계』 『나의 삶 나의 길』『갈 곳 있는 노년』『비오는 밤의 꽃다발』『애인 없으세요?』『 문득 외로움이』 『거울 연못의 나무 그림자』 외. E-book 『이방지대』 『사랑 파도를 넘다』『쫄병의 고독』 외 다수. 직지소설문학상. 한국문학인상. 무궁화문학상소설대상. 손소희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중대로34길 9-3 도서출판 도화 전화 02-3012-1030 팩스 3012-1031 이메일 dohwa1030@daum.net 홍보담당: 김성달 연락처: 010-7941-723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