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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뽑고

능엄주 2020. 6. 23. 18:31

이를 뽑고

 

어제, 나에게는 아주 기분좋은 외출이 예정되어 있었다. 몸에 무리가 왔는지 밤 사이 건강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출발하는 시간을 놓쳐버렸다. 놓치지 않았더라도 나는 걸어서 나갈 기운이 없었다.

 

거의 2천매가 넘는 책 2권 분량의 원고를 하룻사이에  교정보느라고 진을 다 빼서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업연이 종을 치는 날인 줄 알았다. 밤새 온몸에 경련이 일어 단 30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혹독한 고통을 겪은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외출을 체념, 담당자에게 문자를 발송했다. 나는 자리에 누어 천정만 바라보았다. 밤을 꼬박 새웠다고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불면증에 걸려본 것은 30대 초반으로 그쳤고, 나는 어디에서고 잠을 비교적 잘 잤다. 밤을 몽땅 새우고도 잠이 안 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특별히 무슨 걱정거리가 발생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늘은 치과 예약이 돼있으니 억지로라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약속날자를 미루면 그만큼 기다려야 했다. 죽기아니면 살기로 지하철역으로 갔다. 아침 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계단을 내려가다 궁구를까봐 엘리베이터를 탔다. 죽을 만큼 앓고도 집밖으로 나온 사실이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슬슬 기분이 상승하면서 내 마음은 고무되기 시작했다.

 

치과에서 나는 눈을 감고 한 시간여 쉰다는 마음으로 잘 견뎌냈다. 죽을라면 죽어라! 살라면 살아라! 로 그냥 다 내려놓았다. 발치拔齒도 무엇도 어렵지 않게 잘 넘어간 것 같았다. 피솜을 입안에 꽉! 물고서 다시 눈을 감고 집으로 무사히 돌와왔다. 택배 아저씨가 다녀간 흔적!  현관 앞에  2차 교정지가 나를 반겼다.

 

먼 데 가서 이를 뽑았으니 잠시 좀 쉬지, 참 미련하다. 지독하다. 왜 그리 매달리나? 뭐가 나온다고?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왜 그리 지성이냐? 자문자답하는 동안 해가 저문다. 이를 뽑은게 뭐 대수라고? 이 몸이 통째로 사라질 날도 머지 않은데,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다. 하고 싶은대로, 가고 싶은대로 모든 것은 오직 내 마음에 달렸다. 스스로에게 문답하면서 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미쳤나? 주변에서 하는 말이 건성으로 들린다. 미친 건 이미 오래였으니 할 말도 없다. 미치지 않고 이 힘든 사바세계를 어떻게 뚫고 나가나. 내가 사는 길, 나만의 길. 그냥 갈 뿐이다. 지금껏 내가 가던 그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