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가는 마음-2
치과 가는 마음 2
언제나 치과에 갈 때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웬만큼 아파서는 가기 어려운 곳, 안 갈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곳. 치과는 고비용에 치료과정의 험난함 때문이었다.
입만 빼놓고 얼굴 위에 가면 같은 것을 덮어씌우면, 미세하지만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 의사와 간호사가 주고받는 소리, 치아 갈아내는 끔찍한 소리를 듣게 된다, 치료 의자에 누워 있는 심정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왜 그리 길고 지루한지. 왜 그리 고통스러운지,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인다, 침샘이 고여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내가 지금 숨을 쉬기는 하는지 모연해진다. 고통은 둘째 치고 치아 관리를 잘못한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다. 진즉에 치아 관리를 좀 잘할 것이지,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다.
의사 또한 타인의 입을 열어놓고 예리한 의료 기구로 찌르고 갈고 긁어 내면서,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섬세한 진료를 시행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환자의 입장에서도 산부인과보다 더 힘든 것이 치과일 것 같다.
잠시라도 의사의 손놀림이 쉬는 눈치면 얼른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인드 콘트롤 한다. 고상하고 유식하게 무슨 마인드 콘트롤까지. 그저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다. 오죽해서 그런 방법을 다 이끌어낼까.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질 거라는 기상청 예보였다. 하필 그때였다. 오른쪽 이가 아팠다. 흔히 몸살이 나려면 이 말고도 사지 백체가 지끈지끈 아파진다고는 하지만 그날은 유독 이가 아팠다. 한 번씩 지나가는 생리 몸살이 구름 낀 날씨에 적응 못해서 치아에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잔뜩 먹구름이 낀 날씨 탓이라고 여기고 치과를 안 갔으면 오늘날 내 치아가 이처럼 볼썽사납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볼썽사나운 것보다 36살의 내 건강이었다.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 없으므로 건강이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달리게 된것이다. 그날부터 오른쪽 치아는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병원이면 다 병원인 줄 알았다. 의사는 다 의사인 줄 알은 내 무지를 원망해야 할까. 뚱뚱보 의사로서는 그 시간 의사의 직분을 잘 실천한, 의사 역할을 제대로 한, 그런 날이었을까. 혹 술을 마셨는가. 혹 부부싸움을 했던가. 왜 덜컥 생이빨을 뽑은 것일까. 초진환자가 나타나자마자 어찌 이를 뽑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며칠 전에 아니 몇 달 전에라도 한 번 가본 치과도 아니고, 처음 온 환자의 이를 뽑은 그 의사. 진짜 의사 맞는가?
재앙으로 달려가는 우매한 짓거리를 자행한 것,, 평생을 두고 후회막급이다. 내 인생 자체를 뒤흔든,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 계기가 되었다. 가자마자 이를 뽑는 이상한 치과에 가기 얼마 전, 우리 마을에 이동 진료팀이 왔다. 어느 대학 치과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면사무소의 방송을 듣고 그 이동 진료차에 가서 치과 진료를 생애 최초로 받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충치도 풍치도 없다. 잘 관리하셨다.’ 분명 그렇게 나는 들었다.
이상한 치과는 한 개 뽑은 후, 옆의 이가 쓰러지게 되므로 그것도 뽑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위 브릿지라는 걸 했던 것 같다. 차츰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병원 치과로 갔다. 교수의사는 학생들을 줄 세우고, 더 갈고 더 부수는 모양새였다. 얼마 못가 그 브릿지라는 걸 걷어내야 했다. 양옆의 이 한 개씩, 모두 두 개를 또 뽑게 되었다. 급기야 치아 4개가 없어지자 그다음부터 오른쪽 치아는 완전 유명무실, 있으나마나한 무용지물이 되었다.
서울 사는 동생이 보다못해 치과를 소개해 주었다. 그 장로님 의사는 ‘젊은 사람이 안 됐다’ 고 말했다. 궁여지책으로 기둥을 만들어 심고, 가짜 이 두 개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이미 뽑혀 없어진 이가 4개였으나 4개를 다 심을 수는 없다고 했다. 한쪽 치아만 사용하느라 비뚤어진 얼굴 형태가 본래 모양까지는 아니지만 전보다는 보기가 좀 나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새로 만든 치아는 씹는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외관상 보기가 딱하니까. 장로님 의사가 그렇게라도 고안을 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왼쪽 이가 더 견딜래야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왼쪽 치아만 사용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치아와 치아를 받쳐주는 잇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곤란 지경에 처했다. 왼쪽 치아의 수난은 현재까지 이어졌고 식탁에 앉으면 한숨부터 나왔다.
치아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뽑기부터 하는 의사는 잠재적 살인자가 아닐까. 환자에게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안겨주어 오랜 세월 고통받게 하지 않았는가. 인체에서 치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까운 입은 의사 자신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어쩌자고 생이빨을 뽑아? 이를 당장 뽑아야 할 만큼 내 치아는 세균이 득시글거렸던가.
이를 뽑은 그날 밤 일기 예보 그대로 무서운 폭우가 내렸다. 우리 마을 전체가 산사태로 폭삭 무너졌다. 산에서 굴러내린 암석에 사람도 여럿 죽어 나갔다. 우리집도 황토강이 된 앞개울에 잠겨버렸다.
급조된 수재민 천막에서 수재민들은 면사무소에서 나누어 준 라면을 냄비도 숟가락도 없으니 생으로 뜯어 먹었다. 삶의 질서가 하룻밤 새 왕창 깨졌고, 내 치아 또한 산사태를 맞은 꼴이 돼 버렸다.
치아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로 나 같은 경우가 아닐까. 어이없는 일. 두 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내가 겪은 것이었다. 치과 나들이가 빈번했고 돈과 시간을 적잖게 소비했지만 제대로 된, 씹을 수 있는 정도의 치료는 꿈도 꿀수 없었다. 나는 억울하다. 억울 정도가 아니라 이가 갈린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당했나 싶다.
”지나간 일 잊고 치료 잘 받아!“ 친구가 말했다.
최근 친구가 소개해준 치과는, 친구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정상적으로 치료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치료받을 때 몹시 아프기는 해도 의사 사람에 대한 신뢰로 잘 참아낼 수 있었다. 새로 만난 의사와 치료에 안도했다. 다른 치과에서 무슨 건축공사 착수하듯 00만 원의 견적을 낸 것에 비하면 경제적인 측면, 치료 후 결과 등, 의사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고 있다. 의사이기 전에 그는 사람이었다. 치과 가는 마음이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20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