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친구/변영희
뉴욕 친구/변영희
생각이란 도깨비 방망이인가?
오늘 저녁에도 식사 약속이 있다는 동거자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갑자기 뉴욕의 친구가 생각났다. 정말 느닷없이 였다.
친구 생각을 히게 된 것은 생뚱맞고 기묘한 일이었다. 헤어진 지 오래 된 친구였으니까.
친구와 국제우편 보내고 받고, 메일과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언짢거나 서로 낯을 붉힐 일이 일어난 일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주고받는 것을 모아 책으로 엮어도 될 만큼 그 문장이나 내용을 아름답게 평가해도 좋다고 여겼다. 친구에게 받은 엽서와 예쁜 문양의 국제우편은 내 비밀의 상자 안에 아직도 건재하다. 잊을 수 없는, 그야말로 영혼이 통하는 진실한 우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그 친구의 삶이 고달픈 이유였을까? 물론 이민생활이 전적으로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친구는 생계를 걱정할 그런 단계는 아니었다고 본다. 무슨 밥벌어 벅는 일로 걱정을 할 그런 처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두 딸은 한국에서도 유수한 고교에 다니면서 전체 수석을 할 만큼 두각을 나타낸 재원이었다. 미국에 이민가지 않았더라도 서울에서도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뉴욕에 사는 동생의 권유를 받았던가. 이민을 결정하고 한국을 떠나기 전 요리학원에 부지런히 나갔다. 우리는 함께 같은 요리학원에 등록하고 저녁마다 만나서 요리실습을 했다.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집에서 말 못하는 시집이야기며 남편이야기를 친구와 마음 놓고 싫컨 할 수도 있었다.
친구는 나름 영어가 되는 실력이었고, 남편의 수입만 바라보고 멀뚱히 앉아 있을 맹순이 타입이 아니었다. 이민을 가기 위해 꾸준히 영어공부는 또 얼마나 열심히 했던가. 친구는 학구파였기에 미국에 가서도 나름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 생활비는 집 랜트비를 빼면 당시 두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데 필요한 식비가 대략 400불 정도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친구 집 책상 한 귀퉁이에는 돈 통- 이를테면 저금통이 놓여 있고, 그 남편은 날마다 벌어들이는 달라를 그 저금통에 갈무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보스톤의 아들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서 캐네디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네 집으로 먼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돈독했다.
우리는 얼싸안고 볼을 부볐던가!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것은 친구와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친구는 전형적인 서울토박이고, 나는 그 시대로 말하자면 충청도 촌뜨기로 우리는 대학 재학 중 만난 타관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눈빛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단번에 오랜 지기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요는 말이 잘 통한다는 그 점이었던 것 같다. 아니 전생 인연이 깊은 소울 메이트 급이라할까. 그 친구한테는 못할 이야기 없었으니 혈육보다도 공감의 폭이 넓다고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 친구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코네티컷에 사는 다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1일 입원비가 1,000弗이라나. 병원비가 너무 비싸 병원을 탈출하면서부터 친구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남편과 사이가 차츰 벌어지는 눈치더니 금기야 이혼이니, 갈라서느니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때부터일까. 전화도 안 받고 메일도 끊고 그렇게 잘 쓰던 편지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러나 줄기차게 전화를 했고 메일을 보냈다. 어느 날 내 메일에 답이 왔다. 메일의 주제는 '공통분모'였다. 생활환경이 다르고 만나지도 못하면서는 소통의 의미가 희박했던 것일까. 그녀가 공통분모를 거론하면서 일체 내 메일을 무시?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내가 짐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면 그 친구는 보스톤에 있는 내 아들에게 한국식으로 밑반찬을 몇 번 해다가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친절하고 자상한 아줌마의 반찬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지, '아들 가진 사람의 유세' 하면서 항변한 일이 있었다. 나는 친구가 내 아들에게 밑반찬을 해다주는 것도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아들은 내 친구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아들은 말이 아주 간결하다고 할까. 말을 많이 하는 편이 못된다. 코로나 19에 대해서도 비타민 C, 그리고 카레가 좋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어려서도 말수가 없는 아들이었다. 나는 아들의 타고난 성격을 이해하기에 단지 단어 몇 개에 불과한 말에도 감동을 받고 느껴운데, 친구는 아들의 무관심으로 그만 나에게까지 정이 떨어진 것 같았다.
친구의 딸이 한국에 와서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스물 세살 친구 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열 아들 부럽지 않게 엄마를 잘 모실 거라고”
오기를 부리듯,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만난 듯, 힘주어 말 하므로해서 나는 밥맛이 달아날 정도였다. 얘가 왜 그러나 싶었다.
내가 친구에게 아들 있다고 자랑을 할 사람도, 아들 있는 게 자랑거리도 아니다.
그 후 친구와 수년이 흘러가도록 소식이 끊어진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친구가 떠오른 것은 왜 일까. 친구의 음식 솜씨가 생각나서일까. 순 서울식의 그녀의 음식은 담박하고 정갈하면서 맛이 좋았다. 서울 살 때부터 나는 친구가 음식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내 짐작이다. 친구는 바쁜 시간을 일부러 내서 정성껏 내 아들에게 줄 음식을 만들어 뉴욕에서 보스톤까지 차로 달려가 전해주었는데 아들은 그냥 무심하게 받아만 두었던가. 나는 알고 있다. 아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이든 어디든 가서도 그 나라 음식에 적응을 잘 한다는 것을. 음식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리고 미안한 일이지만 고춧가루 범벅인 음식이나 장아찌 종류, 대개 밑반찬이라면 콤콤하고 짭짤한 게 대부분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나는 친구의 절교가 만약 그래서라면 너무나 안타깝다. 아들의 식성을 모르고 그녀가 넘겨짚은 것 같아서다. 더구나 아들은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무척 꺼려하는 결벽성이랄까, 그런 것도 걸리는 부분이다. 그렇다 해도 아들은 아들이고 친구는 친구 아닌가.
모든 교신이 두절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런 저런 사연 있다 해도 나는 수용할 것이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내가 미국엘 가든, 친구가 한국에 나오든, 만나서 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이다. 암 수술이후 건강은 어떠한지, 친구의 출중한 두 딸은 결혼을 했는지 궁금하다. (202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