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변영희
내가 나에게/변영희
나는 딴청을 부리고 있는가. 아니라면 여행을 떠났는가. 눈만 뜨면 쓰던 소설을 마무리해야 한다면서 요즘 거의 매일이다시피 짧은 글을 임의로 써대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어려운 게 소설쓰기라고 하지만, 시작만 하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잘 꾸려갈 수 있는데, 짐짓 외면을 하는 것은 대체 어인 일인가. 여섯,일곱시간을 할일 놓아둔 채 꼬박 책상 앞에 미련을 떨고 앉아 있을 수 있어? 해가 저물고 있는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는 어김없이, 내일은 꼭 쓰던 소설을 끝낼 거야. 정말 꼭이야. 더 미룰 수가 없어! 혼자서 독백을 거듭한 게 몇 번이었나. 애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추상같이 화를 내고 벌세우면서 왜 자기 자신한테는 느슨하게 대하지? 뭘 믿고?
2020년 4월 1일. 오늘도 별 소득 없이 하루해가 저물었다. H중학교 교사 건물 기둥과 유리창에 머물던 석양빛이 스러질 때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다리 뻗고 펑펑 놀은 것은 아니다. 노는 성격도 못 타고 났다. 무슨 책이든지 붙들고 있어야 하고, 놀아도 컴퓨터 그 옆에서 놀지, 멀리 못 나가는 성미 아닌가. 오늘 역시 공염불. 아무런 성적표가 없다. 앞창으로는 개살구꽃을 즐기고 뒷창으로는 황금빛 산수유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가. 게으름인가. 직무유기인가. 현실도피인가. 쓰고 또 써도 소득이랄 게 없어 절망했다는 것인가. 독자도 살림도 늘지 않아 낙담을 한 것인가.
쓰면 되는 것이다 독자가 찾아오든 돌아서 가든, 그저 우직하고 정직하게 그냥 죽어라고 쓰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내가 쓴 글로 언제 쌀 사고 고기 사먹은 일 있던가. 언제 내가 쓴 글로 어깨 힘주고 거리를 활보해 본일 있던가. 언제 글 쓴 값으로 내 인격이 하늘의 무지개가 무색하도록 우아해 본 적 있었나. 언제 내가 글을 써 책을 만들어 자존심 살려본 일 있었던가. 그래도 써 왔지 않은가. 꾸준히, 줄기차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난을 오랜 지기처럼 옆구리에 꿰차고, 일심으로 쓰고 또 쓰지 않았던가. 무엇이 됐든 어떤 정황이든 써야만 내가 '나'일 수 있었으니까
왜 소설을 쓰다가 삼천포로 빠졌던가. 책상에 앉을 때는 분명 쓰던 소설이 머리에 있었다고. 그런데 한 순간 마음이 동요한 것이다. 카툭 오는 소리에, 전화 받다가, 그리고 코로나 19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생각이 다른 데로 흘러간 것이다. 뇌리에서 아우성치는 문장들과 영롱한 언어들을 망각한 것이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내닿다 보니 밤이 되었다. 그게 내 일상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내일은, 또 내일은, 그렇게 3월이 다 가버린 것이다. 어~ 하다가 한순간 물결따라 맥없이 자니치고 만 것이다. 기회가 항상 내 곁에 머물러주는 게 아니다. 나 조차도 물결의 한 부분이 되어서 휩쓸려가면 끝나는 거라고. 일단 시작을 했으면 끝맺음을 해놓고 다른 데 눈을 돌려도 돌려야지, 일 벌려놓고 왜 딴 방향으로 물고를 트느냐고.
보아라! 4월 초하루다. 오늘 무슨 일 했는지 돌아보아. 낮잠을 잔 것 아니잖아. 감기약이든 혈관 개선제든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귀중한 시간 전처럼 잠이나 잘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한 시간이 소중해. 해지기 직전이니까. 해가 지면 이도저도 더는 돌아볼 여지가 없게 되는 거니까.
대강 사정을 헤아릴 수는 있다. 코로나19 기세가 등등하여 두달 여 이상 뒤숭숭한 것, 재채기만 해도 깜짝 놀라면서 가슴을 졸였다고. 심란스러워 손에 일이 인 잡혔다고. 그렇더라도 전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만큼 너그러울 수는 없는 일. 코로나19가 힘겨워도 할 일은 해야한다. 자신과 약속했으면 천지가 뒤바뀌더라도 실행에 옮겨야 해. 이게 뭐야? 살아있으려면 머리도 몸도 글도 움직여야지. 해가 지도록 한 일이 없는데 그게 바람직하냐고? 동물이야? 아무 의식도 없는 하등동물, 주인이 던져주는 부스러기 주어먹고 꼬리치고 빌붙는 노예 같은 몰골 아니겠어?
내가 나에게 실망하는 이유, 그 항목이 너무나 한심하다.
내일은 진짜 세계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어라! 제발 부탁이다. 좋은 작품으로 탄생시켜 출가시켜라. 돈이 명성이 칭찬이,어쩌다 비난이 오더라도 묵묵히 가란 말이다. 여태 해온 것처럼. 스마트한 문학 작품으로, 나와 너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빛내주고. 백치처럼 즐거워하라. 오미자 차 줄창 마시며 편안하게 쓰고 또 써라. 그것이 나의 인생이다.
딴청은 이 시간으로 끝이다. 하던 일 미루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번에는 좀 심했다. 3월이 몽땅 떠나갔으니까. 내일은 달라지기를! 쓰던 작품 끝마치기를! (2020.4.1.23시. 56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