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이 그립다/변영희
산골에 사는 시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소나무 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그 아래 진달래꽃이 발갛게 피어난, 봄 냄새 물큰 나는 사진이었다. 진달래꽃 색깔이 어쩜 이렇게 선명할까. 진달래도 주소지를 어디에 정했느냐에 따라서 꽃빛깔이 이처럼 생생하게 보이는가. 나는 곧바로 그곳에 매입할 만한 땅이 있는가를 질문했다. 경자년 평화를 산골 사는 그녀가 몽땅 누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식날이면 대청호 언덕 부모님 산소에 간다. 우리 형제들은 간단히 제례祭禮를 마치면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근처 산으로 돌아다녔다. 진달래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고, 그게 무슨 색깔일까. 밑동은 보라색이 좀 진한 듯하고 위는 연초록이었을까. 맨 윗동의 고사리 잎은 마치 여염집 처자처럼 다소곳 숙여진 모습이다. 우리들은 달려가 고사리를 손으로 잘랐다. 손아귀에 한 아름 쥐고, 더 이상 쥘 손이 모자랄 때 산에서 내려왔다.
어느 때인가, 반포이모와 선생이모(교사인 이모 호칭)가 산소에 왔다. 나의 큰 오라버니 장례 때였던가. 아니면 작은 오라버니 상사 때 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이모님들은 산소 그 주변의 풍광을 몹시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산속은 새소리와 함께 나무향기 풀향기가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싱그럽고 향긋했다.
선생 이모는 내 어머니에게 ‘어떻게 이런 명당에 산소를 쓸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비아냥인지 시샘인지 모를, 약간은 내 어머니를 폄하 하는듯한 느낌이 들어 우리 형제들이 발끈 한 일이 있다. 중학교 국사 지리 과목을 담당한 교사라면 고려 말의 변안렬 장군, 원나라 노국공주를 호위하고 귀국한 변안렬 장군을 모를 리 없거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찬성하지 않고 불굴가를 지어, 무참하게 참수당한 우국충정의 주인공,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산이 왜 원주 변 씨 문중산이 되었는지, 왜 명당이어야 했는지 짐작할 만했다. 고려 말의 역사를 알면 성삼문의 사육신 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말의 연민 정도는 가져주어도 좋은데 싶었다.
몇 년 전 큰 아들이 귀국했다. 나에게 서재를 지어주는데 거기에 수영장 시설도 겸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은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은 소년스러운 발상이었겠지만 나는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여러 사정으로 아들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제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집 건축, 혹은 위락시설을 짓게 되면 잊지 말고 초청해달라는, 자신의 교수님 사진을 나에게 보내준 것은 아들의 꿈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청주는 내가 태어날 때는 시골이었지만 시내 중심에 사는 나에게 논밭은 가까운 공간이 아니었다. 국립청주교대부속초등학교는 우리집에서 1시간이상 걸어가는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이 대부분 들판이고 시냇물이고 산등성이였다. 올챙이 개구리 메뚜기 나비 벌 뱀 각종 들꽃 풀꽃 등 동식물을 다 만나고 장난치고 해찰부리기에 적합한 곳, 어린이천국에 내가 간 것이었다. 그때 그 추억 때문일까. 나는 시골이 좋다.
시골집이라면 피난 가서 아버지의 먼 일가친척에게 우리 가족이 단체로 구박받은 집, 금강이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엄부리고 올라앉은, ㄷ자로 규모도 크고 안채 사랑채 구분이 정확한 늘리리 기와집, 외양간 옆 외딴 방도 아늑해 보이는 그 친척집이 첫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대청호가 금강 지류로 흐르던 그 시절,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대전 시내에 퍼붓는 비행기 폭격이 먼빛으로 보이는 곳, 6.25 한국전쟁이 치열한 지경에 이른 시기였던 것 같다. 그곳이 내 인생에서의 시골, 시골집의 모습이었다.
너른 마당에 멍석 깔고 누우면 투명한 밤하늘은 온통 별나라였다. 국자 형상의 북두칠성을 보면 우리 형제들은 배가 고팠다. 밤이면 잡초와 생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 그 연기가 매웠지만 쑥 타는 냄새는 싫지 않았다. 피난민인 우리들에게 모기떼는 이따금 따발총을 둘러메고 마을에 등장하는 애송이 인민군 이상으로 겁나는 존재였다. 산기슭에 불을 켠 듯 활짝 피어난 산나리꽃을 만난 것은 그런대로 나의 시골 풍경 목록에서 소중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코로나 19가 터지자 잊고 있던 시골집을 다시 그리게 되었다. 6살에 폐결핵을 앓아 한쪽 폐가 화석이 된 나로서는 미세먼지도 견디기가 힘들다. 미세먼지만으로도 죽을 맛인데 올 봄의 코로나 19는 문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나갈 때는 안경에 마스크에 번거롭다. 내가 사는 이곳은 확진자가 자주 발생하므로 미세먼지보더 몇 배의 공포감을 안겨준다. 친절한 TV 때문일까. 안 보고 안 들으면 무감각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코로나 와중에 둘째가 손자들 진학문제를 고민하다 이사를 갔다. 옆에 살아도 만족할 만한 보살핌을 베풀지 못했다. 나름 내 깜냥대로 수년 동안 그들을 보살펴온 것이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손자들도 유년에서 소년으로 미끈하고 튼실하게 잘 자라 주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방으로 돌아가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 얼마동안이라도 본래의 나, 나다운 나로 환원하고 싶다. 인생 후기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품위 있고 안락한 공간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곳은 자연이다. 나의 시골! 나의 숲! 산골 시인이 보내준 진달래꽃은 그 견인차가 될 것인가.
나의 시골 집. 그곳은 나의 인생 종착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인생 종착점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진정 일 같은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성취하고 싶은 나만의 업무이다. 그냥 편안하게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나의 일이고 나만의 길이다. 철 든 이후 단 한 번도 온전한 '나'가 되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산 것 같기만 하다. 혹은 연극을 한 것 같기도. 버지니아 울프가 절규한 것처럼 나에게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절실하다. 시골집이 그립다. .(2020. 3.31-55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