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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살구꽃

능엄주 2020. 3. 27. 09:55

아파트 화단에 개살구꽃이 피어났다.

그 나무가 개살구 나무인지 진짜 살구 나무인지 나는 몰랐다.

어느 해던가. 밖에 나가다보니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나무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주홍색 열매를 줍고 있었다.

"아저씨! 그것 뭐예요?  뭐 하실려고요?"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는 게 내 눈에 비위생적으로 보였던가. 나는 발거음을 멈추고 경비 아저씨의 열중한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예! 개살구예요. 이거 꿀에 재웠다가 닳여마시면 기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왼손에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고, 오른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여기저기 흩어진 개살구를 주어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개살구  나무 밑에 쪼그려 앉은 경비 아저씨를 뒤로하고 갈길을 갔다.


해마다 개살구 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기 전후 즈음에 산비둘기가 날아온다.

산비둘기는 개살구 나무 가지에 앉아 집중적으로 무엇인가를 콕콕 쪼아댄다. 새로 솟아올라온 꽃순을 먹이로 삼은 것인가. 아니라면 지난 가을 떨어지지 않고 앙상한 가지에 붙어 대롱거리던 잎사귀, 그 잎사귀에 붙어 겨울을 지낸 애벌레를 포식하는가. 산비둘기는 쉽게 개살구 나무를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구욱! 꾹! 구욱 꾹! 구성지게 울지도 않았다.


긴 겨울 동안 먹이에 굶줄여 혼신의 힘으로 개살구 나무 꽃순을 파먹는 것 같아 나는 조바심이 났다. 곧 피어날 꽃봉오리의 진액인지, 나무 잎사귀에 서식하는 애벌레인지 알 수 없지만 개살구 나무에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산비둘기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올해도 개살구 나무는 여전히 예쁜 꽃을 피우고 아파트 단지에 의연하게 서 있다. 구슬같기도, 수수알갱이 같기도 한 개살구꽃, 촌 가시나 웃음소리처럼 활짝 피어난 개살구꽃. 식탁에 앉아 그것을 내려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봄이라는 계절에게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흐뭇하다. 개살구 나무는 꽃도 사랑스럽지만 꽃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도 예쁘고 귀엽다. 가을에 이르러 오렌지 빛깔로 익어가면 그 열매 또한  아름답다.


 기침에 좋다면서 열심히 개살구를 줍던 경비 아저씨!  그 경비 아저씨는 지금 왜 안 보이는 것일까. 개살구꽃이 피어나고서야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에서 떠올렸다.  코로나 19 기세가 등등한  이 아침,  개살구꽃을 바라보며 깊은 우울을 걷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