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어탕에 얽힌 사연 - 산천어 '죽음'의 축제를 읽고/변영희

능엄주 2020. 2. 2. 13:53

언제였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 여자의 육신이 죽음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는가.

숱한 날을 병상에 아니, 죽음의 침상에 엎드려 지낼 때였다.


영혼육이 푹! 푹! 절망의 늪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고 할까.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여자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어쩌다 꿈에 떡맛보듯, 남자를 볼 때 탱천하는 분노였다. 물불을 모르게 치솟는 화의 불길이 여자를 태우고, 집과 인근 이웃을 태울만큼 강렬했다.


니몸 아픈데 왜 남한테 화풀이냐?

세상 여자들 다 애낳고 살아. 우리 형수는 애낳고 사흘만에 콩밭을 맸다고?

병원이 없어? 병원가는 길을 몰라?

병원이 어디인지 난 알지도 못해. 쌔가 빠지게 먹고 살기도 바쁜데 병원을 내가 왜 가?

남들도 다 낳는 애를 낳고, 유세피우는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나 갈 곳이야.

나는 바쁜 사람이야.


몇 차례 난리굿을 치르고나면 여자는 완전 시체가 된다. 살아있되 숨만 겨우 쉬는 시체.

말할 기운도, 화낼 의욕도 다 소진한,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암흑의 시간이 무수히 여자 곁을 지나갔다 효자가 출현했다. 효자는 낚시도구와 천막, 몇개의 컵라면과 버너를 챙겨들고 한강으로 갔다. 한강물 정화운동이 시작되기 전이었을까. 효자는 한강에 이어서 얼마 못 가 임진강으로 낚시장소를 옮겼다.  일터에 나갈 생각도 접고 낚시꾼이 되기로 작정한 듯, 낚시터에서 날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 여자는 누가 왜 어디를 가는지. 임진강에서 무슨 어종을 낚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홀로 병상에 쳐져서 멀뚱히 천정의 꽃무늬만 세고 있었다.  침상에서 방바닥으로 내려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시도'때도 없는 하혈사태로 사망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던 육신에 후각은 살아있었던가, 비리고 구수터분한 냄새가 아파트를 휘감았다. 앞 뒤 베란타 유리창에 온통 뜨거운 열기와 김이 서렸다. 식탁에 소위 어탕, 어죽이 올라앉기 시작했다. 냄새에 이끌려서. 김 서린 실내가 숨막혀서 비실비실 일어나 나오면 마주치게 되는 어탕이었다.


들깻잎 향기도 한 몫 거들었다. 여자가 혼신의 의지로 수저를 손에 쥐었다. 본능적으로 한 술 두 술 어탕을 입으로 퍼 날랐다.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여자의 죽음은 누가 보아도 원통하고 억울한 귀결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욕조에 가득한 메기, 가물치, 잉어, 붕어 종류를 본 것이다. 경악했다. 시나브로 입에 댄 그 어탕이 수많은 물고기의 죽음과 직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여자는 까무라쳤다. 살생에 대해 분노했다.

'안 먹어! 절대 안 먹어! 남의 생명 죽이고 나 살 수 없어' 악! 악!  그동안 뱃속에 우겨넣은 그것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꽃을 꺾어도 그 꺾은 자리에 하얀 진액이 흘러나온다. 꽃나무의 피, 눈물이라고 스님이셨던 외할아버지 말씀이라면서 생시의 어머니가 여자에게 일러주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픔을 느낀다고.


한 두마리도 아니다. 한 말들이 스텐 들통에 반 넘어 물고기를 넣고 고으자면 수 십에 이르는 생명이 죽어줘야 가능하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죄악이었다. 포승줄, 수갑이 아니라도 여자는 그 무엇에 포박지워진 것처럼 영혼이 욱신욱신 아팠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제발 그만둬! 저들을 살려 줘! 나는 아니야!'


산천어 축제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자 여자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명이 그것밖에 안됐는데 온갖 보약 처방을 받는 사람들, 갖은 방법으로 오래 살아남으려고 발악을 하는 군상들, 그 대열에 여자는 끼어들수가 없다. 끼어주지도 않겠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린 시절 미꾸라지 한 마리 호박잎에 싸서 숯불에 구워먹던 그 선에서 종쳐야 했다. 물고기든  뭐든 제 목숨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산천어 축제? 축제가 아니라 비정한 살생놀음 아닌가. 인간이 뭐든 할 수 있다해도 남의 생명까지 유린하라는 건 아니다.

TV 에서 자주 보게되는, 살아있는 낙지를 펄펄끓는 냄비에 집어넣는 장면도 아이들의 교육상. 해독이 큰 것 아닌가. 먹는 것도 방법이 있고 , 종류가 따로 있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은 사라져야 한다.


한겨레 기자의 화천의 <산천어 '죽음'의 축제> 기사가 이 시간 여자를 울린다.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확인하는 듯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