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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버지니아 울프/변영희 옮김

능엄주 2015. 5. 25. 10:27

어떤 소리가 나의 공상을 중단시켰다.

희미하게 떨리는 소리, 방향도 힘도 시작도 끝도 없이 거품처럼 떠올라 약하고 날카롭게 퍼지는 ,

인간적인 의미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 이이 엄 파 엄 소오, 푸우 쉬이 투우 이임 우우...."

나이도 성도 없이 땅에서 솟아나오는 태고의 샘소리.

그 소리는 바로 건너편 리전트 공원 지하철역 앞에 떨며 서 있는 키가 큰 거지가 내는 소리였다.

 

그 거지는 마치 굴뚝이나 녹슨 펌프나 또는 바람에 잎이 다 떨어진 채 가지만 아래 위로 흔들리는, ' 이이 엄 파 엄 소오, 푸우 쉬이 투우 이임 우우....' 하고 노래하면서 끊임없이 미풍에 흔들리고 삐걱거리고 신음하는 나무처럼 보였다.

모든 시대를 통해서 - 이 보도가 풀밭이었던 시대, 늪이었던 시대, 커다란 맘모스가 다니던 시대, 고요히 먼동이 터오르던 시대를 통해서 이 누더기를 걸친 노파는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백 만 년을 지속해온 사랑, 결국 승리하고 마는 사랑이여.' 라고 노파는 노래를 불렀다.

'백 만 년 전 그 옛날 지금은 가버리고 없는 그대와 함께 나는 5월에 거닐었나니 ,

그러나 여름날처럼 길고 빨간 들꽃만이 붉게 타오르는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대는 저승으로 떠나갔노라.

죽음의 신이, 커다란 낫이, 거대한 산들을 쓸어가 버렸나니 백발의 이 머리가 땅위에 누워 차디찬 재로 변할 때면

신이여! 석양과 마지막 햇살이 어루만지는 언덕 위 나의 무덤가에 자주빛 들꽃 한 다발을 고이 던져 주시옵소서.

그 때면 우주의 화려한 연극도 막을 내릴 것이니.....' 하고 노파는 노래를 불렀다.

 

건너편 리전트 공원 지하철역 앞에서 이 옛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 대지는 여전히 푸르고 꽃이 만발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 지저분한 입, 나무뿌리와 잡초가 뒤엉킨 진흙땅에 팬 구멍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지만,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옛 노래는 끝없이 세대의 매듭진 뿌리를 적시고, 묻혀 있는 해골과 보물에까지 스며들면서 잔물결이 되어 보도와 메릴리보운 가를 따라 흘러내려가 유스턴까지 젖은 자국을 남겨 놓으며 비옥하게 만들었다.

 

이 녹슨 펌프같은 노파. 한 손은 동전을 달라고 움켜쥐고 있는, 누더기 옷의 이 노파는 여전히 그 옛날 까마득한 시대의 어느 5월에 애인과 거닐었던 일을 회상하며 천 만 년이 지나도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바다가 된 그곳을 회상하면서.

누구와 함께 걸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남자와 함께, 그렇지!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와 함께.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그 옛날 5월의 밝은 햇살을 흐리게 해놓았다.

 

그때  '그대여, 다정한 눈으로 내 눈 깊숙히 들여다 보아주오.' 하고 연인에게 애걸할 때 - 지금도 여전히 애걸하고 있듯이 -

노파에게는 더 이상 그의 갈색 눈 , 검은 수염,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다만 그림자같이 어른거리는 모습뿐이었다.

이 그림자를 보고 노파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세월은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새처럼 생기 있는 목소리로.

 

'그대 손을 내게로 주오. 살며시 쥐어보리다. 누가 본들 무슨 상관이리요.' 하고 노파는 노래를 계속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도 아랑곳 없는 듯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내 사라져갔다.

마치 낙엽처럼. 발 밑에 깔려 짓밟히고, 물에 젖고, 촉촉히 허물어지다가는 영원한 봄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낙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