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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졸업장/변영희가 쓰다

능엄주 2019. 12. 28. 09:04

빛나는 졸업장


작은 녀석의 졸업식 날이다.

전에는 2월 중순쯤 봄빛이 서서히 지상으로 올라올 무렵 시행하던 졸업식이었다.

올해는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추운 겨울에 졸업식을 한다고 했다.


화정초등학교 주변에는 꽃장수들이 간이 좌판에 꽃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 꽃들이 대부분 조화라는 사실이다. 조화도 생화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내 눈에는 칙칙하고 때 묻은 것처럼 초라해보였다.


한참 자라나는 아이한테 조화를 안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바라만 보아도 좀 민망했다.

생화를 팔고 있는 곳을 찾아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꽃가게는 아직 개점 전이었다. 서리 내려 쌀쌀한 겨울거리를 얼마동안 헤매고 나서 그림을 잘 그리는 녀석의 기호에 어울릴 만한 색색의 예쁜 꽃다발을 만들었다. 매직 팬으로 사랑하는 이동하! 화정초등학교 졸업을 축하한다! 서툰 솜씨지만 글씨도 써넣었다.


제25회 화정초등학교 졸업식은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어디 있지? 운 좋게 빈자리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기 바쁘게 6학년 4반의 열을 건너다보았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꽃우물 체육관은 복잡했고, 졸업생 모두 사각모에 가운을 입고 있어 그녀석이 그 녀석 같았다.


6년 전 서른여덟 고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녀석의 엄마…… .

만감이 교차했다. 엄마 없이 초등학교 6년을 마치는 녀석은 울상이거나 슬픔에 젖어 있을까.

녀석은 하늘만큼 땅만큼 제 엄마가 그리웠을 것이다.

반 애들이 엄마 없는 애라고 놀리고 발길에 차였을 때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그 순간의 쓸쓸하고 슬픈 정도를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가을 운동회 때 김 밥 싸 올 엄마 없는 애가 하필 녀석이라니. 녀석의 신산스런 6년을 헤아리며 눈물을 찍어내다 보니 졸업식은 끝나가고 있었다.


부모님과 사진을 찍은 다음 가운을 교실에 반납하라'는 방송을 들으며 사진 몇 장 찍는 동안 녀석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울고 있지도 않았다. 잔뜩 성난 표정이었다. 친구들한테는 다 있는 엄마가 왜 나한테만 없어? 그런 표정이었다.

음주 뺑소니차에 치여 석달 째 교통사고로 고생하는 녀석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외손자의 졸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오신 외갓집 가족과 우리가족이 숫제 입을 닫은 녀석을 모시다시피 하면서 그 애의 요구대로 자장면을 먹으러갔다. 차에 오르자 녀석은 가방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에 코를 박았다. 가방 안에는 지극한 설움을 견뎌내고 받은 녀석의 빛나는 졸업장이 들어있었다. 그 애의 눈물의 값이 얹혀 진 귀한 졸업장이었다.


화정역에서 좀 멀리 떨어진 오성각五星閣으로 이동하는 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 따라 겨울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2019.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