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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김치

능엄주 2015. 5. 6. 09:33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이다.
小波 방정환 선생님이 최초로 어린이날을 제정한 건 1923년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때 흐지부지되었다가 5월 5일로 다시 제정한 것은 1945년이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도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자랐을 것이다.

우리 자랄 때 그 노래를 불렀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아이들이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은 더러 들은 기억이 난다.

며칠 전 국제 펜에서는 작고문인 묘소를 탐방하는 행사를 가졌다.

늘 성황을 이루어 빈자리가 없던 고려관광버스는 빈자리가 자그마치 여섯, 일곱은 돼 보였다.

조금만 꾸무럭거려도 신청마감으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는데 빈자리가 발생하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날의 묘소 탐방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나는 아픈 중세를 단번에 날려버린다는, 약을 구입해서 먹고  근근 4월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휘져서 도저히 문밖출입이 불가능한 체력이었다. 그런데 웬걸!
혹  마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기운이 씽씽 솟았다. 언덕길, 내리막길을 앞장서 달렸다.

행락 철이라 다른 볼일, 즐거운 모임이 있어 불참한 회원들 덕분에 오히려 더 오붓한 행사가 된 이유인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소파 방정환 묘소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의 종교를 떠나 일제히 머리 숙여 묵념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묘소 둘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오상순, 박인환, 이중섭, 계용묵, 김상용, 한용운 등등 다른 분들의 묘소보다 면적이 넓었고, 명당처럼 주변 경치도 한몫 했다.

우리는 단체사진도 촬영했다.

나는 소시 적에 방기환 임옥인 부부작가 댁에 주소를 둔 적이 있다.

그때 두 분은 모 일간지에 그리고 지방의 일간지에도 연재소설을 연속 집필했다.

나는 두 분 선생님의 원고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며 방기환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기고하는 것은 굉장한 행운에 속한다.

고정수입이 없는 전업 작가에게 연재소설은 일정 기간 동안 정액의 수입을 보장해주고, 더 고마운 것은 일약 유명작가로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부부작가인 그분들의 소설연재가 나에게는 대단하게 보였다.
 
“아하, 그게 궁금하다고? 아마도 소파 방정환 선생님과 이름자가 비슷해서인가봐! 하하하.”
선생님은 한바탕 유쾌하게 웃으셨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돈을 벌어도 별로 쓸 데가 없다는 행복한 비명을 들으며 나는 선생님의 원고작업을 도왔다.
어린이날 즈음해서는 방기환 선생님은 더욱 분망해진다.

어린이 잡지에서도 원고 청탁이 줄을 이었다. 어쩌면 방기환 선생님은 아이들 잡지에 더 많이 글을 기고했던 것 같다.

 ‘쌍무지개 뜨는 언덕’ 과 같은 감동스토리였다. 글과 삽화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어서 글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날 행사에 초청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이후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작가를 방기환 선생님 말고 더는 만나보지 못했다.

올해의 어린이날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설움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엄마김치 때문이다. 오랜 동안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사장되었던 어린이날, 

나는 불현듯 책상 앞을 벗어나 9단지로 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고기를 양념했다. 상추를 씻어 비닐봉지에 담고, 지난겨울 해 넣고는 먹을 일이 없어 저 혼자 농익은 포기김치를 꺼냈다.
어린이날 당일은 복잡할 거라며 고모와 미리 다녀온 서울 랜드,
그리고 일부러 휴가 낸 아빠와 외갓집을 방문하고,

세상에 나와서 불과 몇 년 동안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동네를 돌아보고  온 두 녀석을 그리며 나는 허둥거렸다.

아들이 두 녀석들은 놀러 나갔다고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고기를 구웠다.
“어! 이거 할머니 운동환데?”
“와아! 할머니다!”
 녀석들이 돌아왔다.
“얘들아! 씻고 밥 먹자!”
“흠!”
  두 녀석은 상추쌈에 김치를 넣고 맛나게 먹는다.

“근데 왜 그 김치만 먹니? 그거 묵은지야? 아니면 매워서 씻은 거니?”
 다른 반찬은 일체 젓가락도 안 댄다. 최초로 꺼내 가지고 온 우리 집 김치도 뒷전이다.
“음, 이거, 엄마김치!”
“……”
“애들 엄마가 담아놓고 간 김치라고요.”
 아들이 주석을 붙여주어 나는 겨우 이해를 했다.
“그 김치가 여태 있어? 맛이 안 변했어?”
“너무나 소중해서 아끼느라고 안 먹었어요. 애들이 엄마김치만 찾아요.”

 나는 젓가락을 식탁에 놓았다. 그리고 살며시 일어섰다.

베란다로 나와 앵무새를 보았다.

새장 옆에 있는 화분에서 작은 녀석이 심었을 것 같은, 꽃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파랗게 싹이 트고 있었다.
앵무새 두 마리가 푸드득 먼지를 날리며 날아올랐다.

“그만 먹을 거야.”
 앵무새 기척에 큰 녀석이 나를 돌아본다. 형에 이어 동생도 숟가락을 놓았다.

김치 그릇은  깨끗히 비워져 있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시어꼬부라진 엄마김치에 고스란히 옮겨 앉은 것일까..

어린이날 만찬은 갈비구이보다 엄마김치가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