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묵국수와 찹쌀떡/변영희
집 마당의 푸른 잎이 거의 다 져버리고 심술처럼 시나브로 내리는 비에 살얼음이 잡힌다.
눈발이 날리고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면 거리엔 어김없이 군밤 장수와 군고구마, 붕어빵 국화빵이 등장한다.
작은 목판에 찹쌀떡을 얹어가지고 신작로와 골목을 누비며 찹쌀떡!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찹쌀떡 장수는 멀리서부터 고함을 지르며 쌩! 한 겨울 냉기를 밀쳐내듯 캄캄한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이집 저집의 들창문이 열리고 찹쌀떡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비로소 그 해 겨울이 점차 깊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밥을 이미 먹어둔 뒤이기는 하지만 속이 헛헛한 사람들은 단팥이 듬뿍 들어간 달고 찰진 찹쌀떡을 선호하는 것이다.
찹쌀과 팥은 오리지널 토종 국산품이어서 그 순수 소박한 풍미는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찹쌀떡 말고 도토리 묵국수도 빼놓을 수가 없다.
풍로에 참숯을 벌겋게 달구어 냄비 가득 김장김치와 묵을 채 썰어 넣고 멸치 육수로 보글보글 한 소큼 끓여 국물과 함께 먹는
묵국수의 맛은 일품이었다. 얼큰하고 시원해서 겨울철에 유행하는 고뿔정도는 단번에 뚝 떨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풍로를 중심으로 온가족이 둘러앉아 도토리 묵국수를 떠먹는 그림은 또 얼마나 푸근한가.
영하 19도의 혹한도 겁날 게 없는 가족단합시간이었다. 그래서 도토리 묵국수는 집집마다 인기품목이었다.
C시 같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 귀했다.
고작 오징어와 동태, 고등어 자반 종류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가끔은 해삼사려! 하는 소리도 들려왔으며
아버지는 해삼사려! 하는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탱글탱글한 해삼을 사서 그 자리에서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은 망망대해, 배 위에서 먹는 어부의 즉석 회 요리보다는
못하지만 바다의 향이 초고추장과 어우러져 입안에서 살살 녹는 감촉을 즐길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집에서 손수 장만한 것으로는 그 종류가 많았다. 감주, 식혜, 곶감, 엿, 한과를 들 수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동동주였다. 찹쌀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는 대부분 어른들 차지였지만 술을 다 거르고
남은 소위 술 찌게미 맛은 우리 형제들에게 환상이었다.
서로 경쟁하듯 달작지근하고 새큼한 그것을 퍼먹고 온몸이 알딸딸해진다.
마치 동산에 떠오른 달이 우리들을 달나라로 오라고 손짓 하는 것 같았다
.
겨울밤의 이런 풍경과 음식들은 대부분 당시 전쟁 후의 보통 가정의 야식으로 적당했다.
어느 집에서나 도토리 묵국수와 혹은 두부찌개는 흔한 메뉴였다.
대개는 도토리 묵국수와 함께 겨울 긴 밤을 이야기 샘을 파며 지냈다. 단란한 가족의 밤이었다.
마당 한 편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놓은, 눈비를 가리기 위해 겨울동안 임시로 가설한 미니초막에서
막 캐온 생무 깎아먹는 그 맛은 또 얼마나 각별한가.
뜨끈한 온돌방에 모여 아삭아삭 위장이 서늘할 정도로 차고 시린 무를 씹는 맛은 동지섣달 추운 밤에 제격이었다.
배보다 더 달고 수분이 많은 무는 겨우내 가족들의 보양식이 되었다.
무밥, 무시루떡 ,무말랭이 등 열두 가지 요리에 쓰이고도 무는 질리지 않았다.
현대의 간식은 너무나 다양하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쩌면 간식이 주식을 선도할 만큼 젊은 층에서 애용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대학로에 가면 길거리에 떡볶이와 순대, 호떡 김밥 어묵과 튀김을 파는 천막을 많이 볼 수 있다.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시장 노천에도 엉성한 떡볶이집 천막은 수 없이 많다.
시장 보러 나온 사람들은 속이 출출하지 않아도 어묵 국물 냄새에 이끌려 한 번 쯤은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누구나 마음만 내키면 자유자재로 앉거나 서서 그것들을 즐길 수가 있다.
골다공증에 좋다고 하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은 가까운 곳을 여행할 때 땅콩이나 비스킷, 치즈 아몬드 호두 등의
견과류와 등을 챙겨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먹거리가 지천이다 보니 그런 행위들이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나은 간식거리를 개발하고, 안흥 찐빵이며 영덕 게 하는 식으로
먼 데를 마다않고 찾아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먹는 일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라 할까.
매스컴에서는 극심한 불경기라고 노래하지만 우리나라는 참 살기 좋은 부자나라가 된 것이다.
간식 뿐 아니라 아예 주식인 밥을 먹지 않고 유기농 채소와 버섯, 과일로 식사를 대신할 만큼 식생활 패턴이 큰 폭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도토리 묵국수의 그 시절이 그립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풍로에 참숯을 가득 피우고 둘러앉아 도토리 묵국수를 먹던 추억이 아득히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쉽다.
지금은 둘러 앉아 주식이든 간식이든 함께 나눌 가족조차 귀해서 겨우 일 년에 서너 번 만날까 말까한다.
겨울밤 간식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운데 꿈인 듯 피어나는 옛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내일은 강원도산 묵가루로 도토리묵을 한 번 쑤어볼 것인가.
어릴 때 먹던 쌉싸롬하고 쫀득한 그 맛을 되살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