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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이 글을 쓰다

능엄주 2019. 7. 24. 07:59

날강도보다

더 파렴치하고 극성스런 기침아! 너 해볼대로 해보아라! 나는 일을 해야 하고 내일은 상을 타러 가야 한다.

터지고 싶은대로, 괴롭힐 수 있는 최후의 정점까지 나를 곤경에 빠트려보라.

나는 이제 더 묘책이 없다. 묘책이란 기침 네 놈에게 굴복하여 응급실 천덕구리가 되든지, 고액의 의료비를 빚으로 떼우는 그  막다른 골목의 최후의 선택 말고는 달리 고려해 볼 아무런 사항도 없다.

 

나는 버티기로 한다.

고수머리가 자랄대로 자라 동서사방으로 뻗쳐도 미용실에 나갈 기운과  의욕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궁여지책으로 장롱을 들들 뒤져서 찾아 놓은 나의 예쁘고 푸르던 시절 입었던, 아직도 품은 그냥 그대로 맞는, 옛날 원피스와  그 위에 유난히 눈에 둘어와서 샀던 빨간 재킷을 걸칠 량이면, 롱 스타킹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걸 사러 동네 마트에  다녀올 기력마저 의심스럽다.  162cm의 장신이 후둘거릴 정도로 어지러워 5분 10분 걸어나갈 자신이 없다. 그토록 구들장이 꺼지도록 기침을 하고 무슨 기운이 남았더란 말인가!  단체로 강물을 건너다가 뒤쳐진 얼룩말 궁둥이를 물어뜯는 하이에나처럼 악랄하고 교활한 기침! 너야말로  한심한  족속이 아니냐? 괴롭힐 상대가 따로 있지. 어쩌자고 삼복염천에 나를 건드려?

 

온 세계가 뱅뱅 돌듯, 내 몸이 왜 이처럼 지진이 난 것처럼 사정없이 휘둘리는가.

현미밥 한 수저 뜨다가 갑자기 속이 미슥거려 수저를 놓고는, 왼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꿀물과 체리 몇 알 정도여서일까.

입맛이 어지간해야 팥칼국수라도 사먹으러  조심조심 근처 마트에 나가보는 것인데. 다 싫고 짜증만 심해진다.

.

비가 올 듯, 하늘은 검게 장막을 드리우고 바람결도 숨죽인 답답한 여름 날 오후.

나는 미용실에 가려고 준비하다 털썩 주저 앉고는 입은 옷 그대로 기침 끝에 잠에 빠졌다. 잠이 아니라 혼수였다.

이건 독감이 아니라 자칫하면 죽음을 부르는 사死의 전령사에 다름 아니었다. 얼마나 더 아파야. 얼마나 더 괴로워야,

 얼마나 더 가슴이 빠개지도록 숨이 막혀서야 나는 죽을 수가 있는 것일까.

 

잠도 오래 가지 못했다. 기침때문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무작정 PC 를 열었다.

통증을, 잡념을 날려버리는 데에는 컴퓨터를 열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그나마 최상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눈의 피로 역시  책을 읽을 수 없이 심했다. K님의 비평론집에서 한 단락을 읽은 것 뿐이다. 겨우 7포인트의 작은 글씨가 내 아둔해진 뇌신경을 더 자극하게 할 수는 없다. 

 

PC 외에는 여름날의 무수한 번뇌와 ,육신의 고통을 제어할 다른 무엇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차일피일 미뤄둔 장편 원고를 펼쳤다. 손 볼 데가 많지만 일단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 글자를 12포인트로 키워 그것을 읽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밤 12시!

나는 내 몸의 쉬어달라는 신호에 둔감하지 않기 위하여  자리를 정리하고 PC 를 끈다.

자그마치 4단락을 보았다. 대단한 성과였다.  나 자신에게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하면 할 수 있구나!

미련하지만 밀고나간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던가. 어떤 기척에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밖엔 비가 조곤조곤 내리고 있었다.

아! 새로운 날을 또 맞이했구나. 선물이구나. 소중하고 귀한 나의 시간!

기침이 물러갔는가. 항거하는 내 서슬에 놀라 잠시 주춤하는 것인가. 독감이 무섭지만 피할 수 없었던 나!

 

바라건대 제발 기침이여! 그만 좀 괴롭혀라. 기침 너가 나에게 깃든 것이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반가운 손님도 한달이란 기간은 질리게 한다. 기침, 너는 반가운 손님 아니잖아. 성가신 마구니 종류잖아.

오늘은 나에게 좋은 날이다. 모처럼 사람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싶다.

이글은 내가 쓴 게 아니고 기침이 시킨 것일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경우 기침은 갑자기 철든 사춘기 소년처럼 잠잠했다.

기침은 그 사이 내 동지가 된 것일까. 기침이여 이쯤에서 우리 안녕하기로 하자!

 

2019.7.24. 08씨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