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희 소설집 입실파티를 읽고 /곽정효소설가
변영희 소설집 입실파티를 읽고
곽정효
<그 가을의 카오스>에서 그녀는 혼돈과 미로에 대해 고찰한다. 자연의 순환질서 앞에서 그녀는 혼돈이고 미로였으며 주체는 늘 자신이었다. 후반에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불영사 연못에 뜬 부처님을 만나고 있다. 귀중한 이집트 연구가 로제타석에서 시작되었음을 떠올려 보게 한다.‘로제타’석을 최초로 해독한 사람은 십여 개 국의 언어에 능통한 학자 프랑스의 샹폴리옹(1790~ 1832)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이 걸려 1822년에야 해독을 했다. 이 로제타 석 해독 과정은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지만 <그 가을의 카오스>에서 그녀는 혼돈과 미로를 파헤치고 사색하며 인간 존재에 가까이 가고 있다. 주역의 태극을 거쳐 상제를 거쳐 이벽까지 만난다. 자신의 외도를 돌아보며. 이런 정신과 탐구 과정이 문명의 저변을 넓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머니의 구호>를 보자.
주인공의 자리는 슬픔 속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리에서, 할머니의 자리에서 상처를 공유한 가족들을 위해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함께 살던 사람과의 이별이란 마음 한 자락을 잘라가는 일이다. 특별한 인연의 처절한 죽음은 남은 사람의 일부가 죽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의 손을 놓는 일은 몸의 피가 함께 빠져나가는 일이다. 자식일 때 하늘이 무너진다. 어머니에서 손자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길들이 마음을 흔드는 작품이다.
<입실파티> 에서는 초반에는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토지 문학관의 하숙생들이다.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자기만의 방이 절실해서 온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인서는 ‘풍경의 탄생’을 읽으며 몰입한다. 시론에 이어 여성문제를 잘 꼬집고 있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황홀경에 빠져 읽었던 ‘문심조룡’을 떠올린다. 입실파티에 오라는 동화작가의 청을 받고 인서는 난감해 하지만 참석한다. 낼 병원에 가봐야 하는 입장이다. 좌장격인 사람이 바로 ‘풍경의 탄생’의 저자임을 알고 놀란다. 문학을 위하여 잔을 든다. 우수한 예술가 집단의 일원으로 편입한 듯하다. 고무되고 분발심도 생기고 갑자기 작품도 써진다.
<고래 춤추다>에서는 지하철 바닥에 반복해서 환상의 어항을 내려치는 행상 아저씨 이야기가 산뜻하다. 지하철 안 행상들의 묘사와 관찰이 날카롭다. 어항에 대한 동경은 시골집에 내려가 살기를 꿈꾸는 도시생활인들의 멀고 먼 허공의 메아리로 이어진다. 병원치료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희망이 아니다. 그녀의 퇴락한 입맛을 찾아준 것은 어탕이다. 어탕은 기력을 찾아 주고 건강은 희망 곡선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욕조 안의 물고기들이 어탕의 출처임을 알고는 어탕 먹기를 중지한다. 이제 그녀는 비록 장난감이지만 청색 고래가 속에 살고 있는 어항을 보물로 여긴다.
<기쁨의 화신>에서는 늦게 대학원에 발을 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경자 씨가 나온다. 과정은 엄청난 고역이다. 석사 논문은 머리에서 쥐가 나고 박사 논문은 전신에서 쥐가 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논문 통과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경자 씨는 지도교수의 처신에 실망한다.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동료에게서 비감과 울화가 느껴진다. 제 2의 삶, 믿었던 학문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빗나간 것일까 눈물이 솟구친다.
작가는 <고래 춤추다>에서도 <기쁨의 화신>에서도 인생길의 선한 발걸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눈물을 흘려도, 희망을 접어도 독자에게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 그 눈물은 학문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탕을 멀리하는 행위는 생명에의 온기로 다가온다.
<끝없는 여정>에서는 <기쁨의 화신>에서 채 읽지 못한 늦은 학구열과 장애물(?) 때문에 고전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지도교수는 깨지지 않는 돌 같다.
<악양 호박>에서는 논문병을 앓고 있는 경자 씨가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위로를 얻는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순수함의 힘, 악을 이겨내는 선을 믿고 싶은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찾아갈 지리산이 있고 친구가 있다. 경봉 스님의 삼소굴 일지와 호박씨 한 봉지는 지리산의 선물이다. 인생사 모두가 꿈이라며, 웃을 일 없어도 웃고, 있어도 웃고 살라는 경봉스님의 선시, ‘삼소굴 일지’를 읽은 덕으로 ‘황제의 딸’을 볼 때처럼 웃을 수 있다. 호박처럼 둥글둥글 살자, 다짐한다.
<외나무 다리> 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경애는 인사동에서 친구 순희를 만나기로 한다. 어렵게 찾아간 곳은 순희 이모가 경영하는 음식점이다. 거기서 윤숙례라는 여인을 만나고 경악한다. 인사동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여자는 바로 언니, 경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다. 순희 이모가 화해를 주선한다. 경선이 요절한 것은 전쟁의 소용돌이였으니 이제 화해 해야지, 시대를 잘 못 만나 그리된 걸. 하고 말한다. 하지만 거짓 증언으로 사상범을 만들어 감옥에 넣었으니 묵과할 수 없는 죄질이다. 용서? 언니와 부모가 저승으로 갔는데 용서? 경애는 비통한 울음을 토하며 주저앉는다. 우리 민족 곳곳에 있는 외나무다리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이를 무시하고 학구열에 불타는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동시에 소설을 쓰며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는 좌절과 슬픔과 울분의 웅덩이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체념과 절망으로 황폐해져가면서도 끊임없이 등불을 내걸고 길을 찾는다. 생명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 용기와 긍정의 온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팔다리를 펴게 만든다.
[출처] 변영희 소설집 입실파티를 읽고 |작성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