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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의 대화] 매천야록과 고종·민비/매일경제/변영희 퍼옴

능엄주 2019. 3. 17. 08:57


역사와의 대화] 매천야록과 고종·민비

문화재청이 고종 치하 47년간 국내 실상과 조선 주변의 국제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매천야록'을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근대문화유산에 부여한다.

한말 3대 문장가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의 대표작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민비)의 모럴해저드, 민씨 척족의 국정농단을 이보다 세세히 묘사한 저술도 없다. 민비는 아들 순종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민비는 아들이 잘되기를 비는 제사를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가며 지냈다. 하루에만 천금의 비용을 썼고 결국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조리 탕진했다. 이후 매관과 매과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순종은 부인을 두 명이나 뒀지만 고자여서 자식이 없었다. 민비는 충청도 무당을 대궐로 불러들여 진령군에 봉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벼슬이 무당한테서 나오니 고관들이 몰렸다. 무당은 무뢰배 이유인이 귀신을 부릴 줄 안다며 민비에게 아뢰어 양주목사를 하사했다. 민비는 홍종우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해 시신을 갖고 왔을 때 정변에서 죽은 인사들의 자제들이 김옥균의 배를 가르고 간을 씹지 않는다고 격분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등 정적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아 신분 노출을 꺼렸던 민비는 사진·초상화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민비를 제거키로 한 일본은 민비의 측근인 일본 여자 고무라를 시켜 민비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궐 밖에서는 시해사건이 있기 전부터 민비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민비의 도움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정병하가 그녀를 배신해 달아나지 못하게 막았다. 민비는 고무라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죽어갔다. 황현은 "영리하며 권모술수가 풍부해 정사에 간여한 지 20년 만에 나라를 망쳤다"고 개탄했다. 민비 일족도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임오군란 때 반란군이 민비의 친척 오빠 민겸호 집을 습격하니 진귀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는 불꽃에서 오색이 빛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의 향기는 수 리 밖에서 맡을 수 있었다. 도주했던 민겸호는 반란군에 붙들린다. 반란군과 함께 온 흥선대원군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대원군은 쓴웃음을 띠며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란군이 달려들어 민겸호를 난도질했다.

유력자 사이에서 매관매직이 일상화됐지만 고종까지 직접 나서 벼슬을 팔아먹었다. 밀양 사람 박병인은 왕에게 35만냥을 내고 경주군수 자리를 받았다. 돈독이 오른 왕이 수령을 빈번히 교체했다. 수령은 임기가 너무 짧아 바친 돈을 채 거둬들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청나라 공사 서수봉이 고종을 알현하면서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 되어도 임금의 자리가 건재하니 어찌 풍속이 아름답다 하지 않겠소"라고 놀렸다. 고종은 민비가 쫓아냈던 상궁 엄씨를 아내가 죽은 지 불과 5일 만에 데려왔다. 입궁한 엄씨는 정사에 간여하고 뇌물을 챙기는 정도가 민비 못지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이 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숨어 술을 마시며 통쾌해했다. 반면 순종은 친히 통감부에 행차해 이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줬으며 장례비로 3만원(4억원), 유족 위로비로 10만원(13억원)을 지급했다.

뮤지컬 등의 영향으로 민비가 격변의 시대에 나라를 위해 외세에 맞서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비련의 여인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고종의 행적도 새로운 각도에서 평가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뤄진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다며 고종 국장을 재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비는 그저 아들 등 가족,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 치열했던 것뿐이다. 고종 역시 국권 침탈의 최대 원인 제공자라는 책임을 벗기는 힘들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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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스Z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