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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여사님, 이렇게 날씨도 화창한데 차라도 한잔.."/홍여사 입력/변영희퍼옴 2018.12.08 03:02

능엄주 2018. 12. 8. 23:38

[아무튼, 주말] "여사님, 이렇게 날씨도 화창한데 차라도 한잔.."

홍여사 입력 2018.12.08 03:02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 안병현

직선과 직선은 교차하지 않으면 평행을 달립니다. 그러나 두 개의 원은 접점을 갖지요. 우리 안의 직선을 둥글려 원을 만들면, 굴러가다 어느 순간 다른 원을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저릿하게 맞닿는 지점이 생겨납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에서조차….

홍여사

"얘, 큰애야, 이리 좀 와 봐라."

어머님댁 식탁에 앉아 식후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리 어머님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친 건, 부엌 창으로 다용도실을 내다보았을 때. 어머님은 거기서 저를 손짓해 부르고 계셨습니다.

어머님은 가끔 그러실 때가 있습니다.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안방이나 부엌에서 저를 손짓해 부르시죠.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면 용건은 대개 허무할 정도로 사소합니다. 자잘한 글씨의 설명서 같은 걸 읽어달라시거나 화장품 바르는 순서를 적어달라 하십니다. 별일도 아닌데, 굳이 며느리를 아들 없는 방으로 불러들이시는 이유는 아마도 소소한 일상을 우리 여자들끼리 속닥속닥 해결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신가 봐요. 딸이 없으시니, 며느리를 부를 수밖에요.

그런데 이번엔 안방이 아니고 다용도실입니다. 보안 수준을 높여야 할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테지만 저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어머님께 다가갔습니다. "뭔데요, 어머니?" 그러자 뜻밖에도 어머님은 낮은 한숨을 토해내시며 핸드폰부터 내미십니다. 화면엔 메시지 하나가 떠 있더군요. "오늘 이렇게 날씨도 화창한데 우리 여사님은 무엇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맞춤법도 군데군데 틀리고, 스타일도 완전 올드하지만, 누가 봐도 작업 거는 멘트. 놀란 저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님은 당신도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십니다. "어휴. 내가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다. 아범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라."

거듭 다짐을 받고서야 털어놓으신 어머님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머님 친구분 중에 워낙 재력도 있고, 화려한 멋쟁이이신 분이 있는데, 며칠 전 그분을 따라 단골 귀금속점에 갔었답니다. 어머님은 그냥 따라만 간 것이고, 물건을 고른 사람은 친구분이었죠. 그런데 그 가게에서, 역시 단골인 듯 앉아있던 어떤 할아버님이 말을 걸기에 잠깐 잡담을 나누었다지요. 그런데 그 가벼운 대화가 어째 좀 이상하게 흘러가더랍니다. 사는 동네는 어디쯤이신가? 운동은 어떤 걸 하시나 묻더니 이내 자식들은 몇이며 어디 사는가? 혼자 사시나? 혼자 되신지는 얼마나 되시느냐까지 묻더랍니다. 그쯤부터 기분이 이상해 대답을 안 하셨는데, 기어이 이 남자는 곁에 다가앉으며 본격적으로 자기소개 겸 자랑을 시작하더랍니다. 공직에 있다가 퇴직 후 사업을 했고, 자식들은 두루 잘되어 있으며, 재산이 이만 이만하다는 그런 얘기를 말입니다. 수작이 하도 뻔해 보여, 어머님은 친구분을 재촉해 그 가게를 나오셨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쯤에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그 남자가 그날부터 며칠째 메시지를 보내고 있답니다. 그것도 갈수록 야릇함의 수위를 높여가며. 어머님은 이제 불쾌감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아들에게는 부끄러워 차마 말을 못 하고, 저에게 털어놓으신 거죠. '이 찝찝하고, 억울하고, 부끄럽고, 불안한 기분을 너는 알지?' 하는 눈으로 어머님은 저를 쳐다보십니다.

저는 일단 어머님을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번호는 아마 그 가게 사장을 통해 어찌어찌 알아냈을 테지만, 집까지는 모를 거라고요. 그러고는 당장 그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아들인데, 용건 있으면 제 번호로 전화하라고요. 그러고는 어머님 휴대폰에서 번호를 차단해버렸지요. 옳지, 옳지 하며 아주 속 시원해하는 어머님을 향해 저는 말했습니다. "와, 우리 어머님 아직 살아있네?" 어머님은 그제야 픽 웃으시며 저를 툭 치십니다. "얘는, 남사스럽게, 내 나이가 몇인데…. 하긴, 십 년 전만 해도 별별 성가신 소릴 다 듣고 다녔지만."

저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습니다. 어머님의 말을 못 믿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아마 그 말은 과장이 아닐 거예요. 우리 어머님이 그야말로 한 인물 하시거든요. 처음 인사드릴 때, 연세보다 십 년 이상 젊어 보이는 나긋한 옷태와 깨끗한 피부에 놀랐었지요. 그런 분이 마흔 몇에 혼자 되셔서 그제껏 아들 둘만 바라보고 사셨다는 겁니다. 처음엔 그런 홀시어머니가 부담스러웠고, 때론 어머님의 어이없는 심술에 화가 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제 나이가 마흔 몇, 그 나이에 이르고 보니 같은 여자로서 짠한 생각이 듭니다. 나라면 당장 남편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돈만 있다고 살아질까?

그러나 어머니의 아들들은 그런 생각을 할 줄 모르더군요. 애잔한 줄도, 고마운 줄도 모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원래 강하고, 욕망 같은 건 없는 줄 아나봅니다. 제 아들이 여섯 살 때 저에게 "엄마도 옛날엔 젊은 사람이었어?"라고 물은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습니다. 이래서 엄마에겐 딸이 필요하다는 거겠죠?

그날 밤 남편에게 불쑥 말했죠. "당신 알아? 왕년에 어머님한테 마수를 뻗친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거? 지금도 어디 가면 먹히는 미모이시라는 거?" 그러자 남편이 말하네요. "에이, 설마. 엄마 나이가 몇인데…." 오늘 들은 얘기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머님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남편의 반응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 그럼 엄마 지금이라도 좋은 분 찾아 시집가라고 해야겠네. 하하하!'

하지만 일흔을 넘긴 어머님이 듣고 싶은 아들의 말은 그게 아닐 겁니다. 시집가라는 말은 이십 년 전에 들었어야 할 말. 이제는 아마도 이런 말을 더 듣고 싶으실 테죠.

"엄마, 절대 어디 가지 마. 엄마는 내가 끝까지 책임질게. 아들 믿지?"

같은 여자로서, 며느리임을 잊고 시어머님이 무척 애틋해지는, 아주 가끔 있는 밤이 바로 오늘 밤이네요.


출처 : 다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