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정치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인간과 정치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
추리소설의 매력은 삶의 잔혹함 앞과 뒤에 버티고 있는 인간에 먼저 주목하여, 그(녀)의 탐욕, 위선, 어리석음 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한때는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를 좋아했고, 존 그리셤의 다음 작품을 고대하는 열성 독자이기도 했다. 법정소설이 지루해질 즈음은 북유럽작가들을 접하면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과 요 네스뵈의 길고 긴 소설들에 밤새워 빠져들었다. 그러나 장르소설이 대체로 그렇듯이, 장편으로 갈수록 왕왕 플롯이 스토리를 촘촘히 받쳐주지 못해, 저자가 겪었을 법한 고충이 독자인 내게도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는 G.K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나 크리스티의 마플 할머니(Miss Marple)가 해결사로 나서는 짤막한 소설들에 더 마음이 쏠린다. 인간을 이해하는 문제 마플은 인간의 속성을 훤히 알고 집요하게 달려들어 기어이 파멸을 보고야 마는 사탄의 계략을 남보다 먼저 간파한 인물일지 모른다. 인간실존의 정곡을 짚는-때론 사람의 입을 빌려-사탄의 ‘명언’들은 넘쳐난다. 가령 구약의 욥기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되 끝은 창대하다”고 속삭이거나 “불꽃이 위로 치솟듯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난다”고 명쾌하게 삶의 실상을 정리해 준 이는 의인 욥이 아니라 신의 질책을 받은 그의 친구들이었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인생의 황금나무뿐”이라며 너스레를 떨거나, “교회의 위장은 튼튼해서 온 나라를 집어삼켜도 결코 탈 나는 법이 없다”며 정색하던 이는, 세상 학문을 통달했다는 파우스트를 농락하던 메피스토텔레스였다. 욥을 의인으로 추켜세우는 신에게 “그가 아무런 유익도 없는데 당신을 경외하던가요?”라는 촌철살인의 반문으로 인간의 욕망을 꿰뚫던 이 또한 사탄이었다. 견제 없는 정치의 위험 그 기원이 본성이든 환경이든, 물질과 인정(認定)의 욕망 혹은 이해관계에 갇힌 인간은 인식과 도덕적 판단을 자의로 중지 또는 왜곡하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거나 정당화하느라 분주하다. 그리하여 신학자 팀 켈러는, 인간이란 자신의 허물을 은폐하고 선함을 증명하고 승인받기 위해 “끝없는 소송(endless litigation)” 중에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자신의 과오에 몸서리치며 선한 삶을 살리라 다짐을 거듭해도 그 즉시 다시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민주주의는 인간과 삶의 실상에 관한 이런 인식에 조응하는 정치체제다. 가령 그것은 정의를 추구하되, 도덕적 사명감에 불타는 권력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홀로 돌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내용에 앞서 “견제와 균형” 혹은 “상쇄력의 제도화” 등 절차로 먼저 규정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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