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지장사 경내에는 연분홍 함박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함박꽃은 어릴 때 우리집 화단 중앙에 진자주빛으로 소담하게 피어난 기억이 났고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덕성스럽고 미더운 느낌은 여전했다.
나의 어머니는 여섯 명의 딸로도 모자라 집 앞뒤로 화단을 일구고 각종 화초를 심으셨다. 그런 까닭에 나는 친구들보다 화초 이름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오늘 나는 크게 작심을 하고 국립현충원에 갔다. 전부터 친구가 우울하다고 토로했으므로 어떻게 하면 친구와 함께 유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연구한 끝에 동작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실 이몸도 근래들어 우울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친구의 우울증에 적극 동참하게 된 동기가 된 셈이다.
"왜 하필 국군묘지냐?"
친구는 급하게 서둘다 한약 봉지를 데워만 놓고 미쳐 복용을 못하고 달려간 나에게 투정했다. 5월 마지막 휴일 날씨는 가히 경탄할 만 하고 흑석동과 한강을 거슬러 온 바람결은 상쾌했으며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걷기에 딱 좋았다.
"너 괜찮아?"
며칠 전 부산으로 떠나려다 갑자기 컨디션에 불길한 변화가 발생하여 포기한 나에게 친구가 질문했다. 나 빼놓고 몇몇이서 온천도 하고 자갈치시장도 들리고 부산여행이 쏠쏠했던 모양이었는데 나는 더 이상은 내 병증?에 대해 첨가를 하지 않았다. 정밀하게 관찰해보면 아픈 부위가 몸보다 마음 부분이 틀림없고 우울증은 만병의 원인이라는 내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친구는 나이들어 부쩍 육체활동이 줄어든 그녀의 남편을 성토했다. 삼시세때 식사 수발이 예삿일이 아니라고 호소했으며 게다가 그녀 남편께서는 가끔 냉장고를 열어 사다놓은 야채재료가 시들고 있으면 친구 앞에 들이대고 힐난을 한다는 것이다.친구의 이야기가 자칫 국립현충원을 찾은 의미를 희석시킬 우려를 가지게 했다.
나는 좌우의 하얀 비석들을 살펴보며 묵묵히 걸어갔다. 코를 흠흠 거리며 수향도 들여마시고 깊은 생각에 잠겨 화살표를 따라 올라가던 중 분홍색의 사랑스러운 함박꽃 권속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야아! 이건 완전 우리들 20대 모습 아니니?"
약수터에서 물을 뜨고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아랑곳 없이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20대에는 귀신도 이쁘다고 했지 않은가.
친구야 너의 인생이 억울하다고 여겨질 때는 여기 국립현충원 잔디밭에 누워 있는 숱한 호국영령들을 떠올려 보라.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왜 그들은 준비도 안된 채로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상기해야하는 계절이 아니냐.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으니 오늘의 우리나라가 존재하고 우리들이 있게 된 것이 아니더냐. 침묵으로 말을 대신하며 때로는 대승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나는 힘차게 다가가 함박꽃과 마주섰다. 함박꽃이든 달리아든 한송이꽃으로 다시금 피어났을 수많은 영령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경건하게 기도드렸다. 한송이꽃은 마음만 먹으면 친구도 나도 가능하다고 믿고 싶었다. 우울증이나 앓고 있어서는 안되지 않는가.더구나 6.25를 몸소 겪은 세대인 우리로서는.
"그래도 옆에 있어주는 게 어디니? 고마운 점도 잊지 마"
나는 진정을 담아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와 함께 현충원 곳곳을 돌아보는 동안 호국영령들의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가만히 귀 기우렸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後略
故 모윤숙시인의 詩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도 생각났다. 곧 6.25 발발 00주년이 다가온다. 급변하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단연 6.25의 상처다. 6월 한 달 만이라도 현충원에 와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어주자고 결의를 다진다.
친구야! 너와 나의 .6.25가 어떠했는지 회고해봐! 그깟 우울 같은 것은 진즉에 떨쳐버려.
나는 표정으로 말하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B29가 소란스럽게 훑고 간 00년 전의 하늘이 저만치 보였다.
길게 그어진 하얀선 위로 B29의 굉음도 들려왔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나는 친구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그곳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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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5-31 1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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