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비오는 밤의 꽃다발 /변영희

능엄주 2017. 7. 10. 05:18


K변호사와의 약속은 나를 긴장시켰다. 시간이 넉넉한데도 나는 점심식사도 거른 채 빗길을 나섰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는 상당히 깐깐하고 붙임성 없는, 어쩌면 까다롭고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언제나 사람을 만나는 일, 더구나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맛까지 감소시킬 만큼 내게는 피곤 그것이다.


낮 시간이 피곤하게 되면 그런 날은 밤 시간까지 제대로 된 원고 한 줄 못 쓰고 심리적으로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견비통을 앓느라고 다섯 달 이상을 징징거리고 다녔다. 한적한 산촌에 들어가 동면하는 개구리처럼 꼼짝 않고 엎드려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함께 간 친구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k변호사에게 사무적으로 내 용건만을 말하고 재빨리 내 방으로 숨어들었다.

오히려 얘기가 간단히 끝나서 다행이었다. 반드시 어떤 결론이 맺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단한 기대도 갖지 않았다.


내 방으로 돌아오자 얇은 타올을 덮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1박 2일 이리 여행의 여독이 채 가시지 않는데다 장마철의 눅눅함이 내 기분을 여지없이 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옆 사무실  앞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어렴풋하게 들으면서 나는 약에 취하여 잠에 떨어졌다.

열 일 제치고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 몸은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 오는데 나는 일찍 들어가겠어!”

남편의 목소리가 비에 젖은 듯 무겁게 들려올 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에 다시 앉았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내 머릿속 상념들도 달걀귀신 번져가듯 자꾸자꾸 부풀어 올랐다.


‘굉장하구나. 힘이 있어. 시 속에서 숨 쉬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있어.’  D스님의 시집은 나의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살아있는 시. 깨어 있는 영혼. 이 세상에 진짜로 멋있는 사람은 스님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마음에 쏙 드는 시 구절을 노트에 적었다. 팔이 아파지면 왼손으로 주무르고 두드리고 하면서 몇 편의 시를 적고 나니 이만하면 오늘 하루를 잘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검은 밤이 빗소리에 퐁당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D스님의 시집 외에도 또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읽었다.

헛된 하루는 아니었다는 뿌듯한 만족감이 비안개처럼 잔잔하게 나의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팔 아픈 것을 잊어버렸다.

아픔 같은 건 이길 수 있다고 자신에게 호언하였다.그렇게 높은 도로 올라가는 내 마음은 밤길에서조차 당당했다. 독서의 힘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리 세미나에서 부른「칠갑산」은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피곤 때문에 음질이 곱지 않기 때문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사연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대는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내 옆을 지나가는 행인들이야 듣거나 말거나 나는 잘 안 넘어가는 구절을 되풀이해서 부르며. 신탁은행 인사동 지점 앞을 통과하여.

 24시간 편의점과 꽃집을 지나 세민약국으로 들어갔다. 트랑코팔 이십 알을 산 다음 우산을 활짝 펴들고 종로로 걸어갔다.

「칠갑산」노래에 박자를 맞추면서.


빗줄기가 좀 더 굵어졌다. 분명히 난다랑 입구에서였다. 갑자기 웬 키 큰 남자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우산 좀 같이 써도 되겠지요?”

술 내음이 약간 나는 것 같았지만 흘깃 바라보니 결코 무뢰한은 아닌 것 같았다.


“댁이 어디십니까? 저는 〇〇동에 사는 미스터 윤입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Y대학교를 나이 먹어서 늦게 졸업했습니다.”

남자는 외운 듯이 자기소개를 마치더니 불쑥 한 다발의 장미를 나에게 내밀었다. ‘받아주십시오’ 하고.

나는 영문을 몰라 걸음을 멈추고 키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의 옛날 애인과 닮았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잔 사겠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장미 꽃다발을 받고 남자와 나란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그러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인사도 정중했다.

마침 그때 좌석버스가 와서 나는 냉큼 올라탔다.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든 채로.


대체 무슨 일일까. 어떤 연유로 나에게 꽃다발을 주는가. 그는 내가 매일 그 시간에 그 앞을 지나가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식으로 기분이 약간 수수해져서 좌석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장미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그윽하게 웃었다.


흑장미 여덟 송이였다. 큰 것 네 송이, 작은 것 네 송이.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살다보니 별일을 다 만나는군. 피곤하게 진행된 나의 낮 시간과는 달리 장미꽃으로 말미암아 늦은 밤에 이르러서

나의 하루가 풋살구의 신맛처럼 삼삼하게 마감되려 하고 있었다,


“엄마! 비 오는데 꽃은 왜 샀어?”

나는 대꾸 대신 빙긋 웃으며 딸애에게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내 입 주위로, 두 볼로 눈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남자의 옛날 애인으로 오인될 만큼 아직도 나에게 예쁜 그늘이 남아 있는 것인가.

순간 견비통의 무던한 아픔도 장맛비의 눅눅함도 어딘가로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엄마 멋쟁이다. 비오는 밤에 장미꽃을 다 사오구…….”

나는 딸애의 말에 실실 웃으면서 식탁으로 다가 앉았다. 투명한 유리컵에 꽂아놓고 보니 셀로판지에 싸여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큰 송이 넷, 작은 송이 넷. 엄마 어떻게 이렇게 샀어?” 딸애는 여덟 송이의 흑장미가 계속 신기하다는 얼굴이다.

“것도 다 뜻이 있네요. 으하하하.”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젊은 사내처럼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비오는 밤의 흑장미 여덟 송이는 내 생애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