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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叛亂)

능엄주 2017. 5. 5. 19:42

반란

우리 집에는 커다란 국어대사전이 있다. 내가 글줄이라도 쓰는 날이거나 원고 교정을 맡게 된 날이면 하루에도 몇 차례 책꽂이에서 끌려나오게 되는 오래된 책이다. 너무 크고 육중해서 어떤 날은 그보다 책의 부피가 훨씬 작은 옥편으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좀 무겁고 귀찮기는 하더라도 국어대사전을 펼쳐 보는 일이 더 신뢰가 간다. 크고 두터운 만큼 내용이 충실하고 다양하다는 나름대로 상식도 작용한다.


오늘도 나는 한 단어, 즉 ‘반란(叛亂)’이란 단어의 뜻을 재삼 음미하고자 국어대사전을 책꽂이에서 책상으로 운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반란’은 ‘배반하여 난리를 일으킴. 혹은 모반(謀叛)’으로 표기되었다. 이미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사용한 것이면서도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곡절이 있다.


내가 <마흔 넷의 반란>을 쓸 때 얼마나 고심하고 애쓰면서 발견해낸 단어였던가는 언젠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또는 글 속에서 몇 차례 피력한 바 있다.

여학교 때 이후 우리는 흔히 장래희망을 질문 받으면 누구라도 약속한 듯 현모양처라고 말했다. 현모양처는 높은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간에 그 시절 모든 여성들의 지고한 목표이었다. 현모양처를 제쳐놓고 감히 어떤 여성도 다른 직업을 운위하거나, 어쩌다 비명에 가신 나의 언니처럼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런 여성은 단번에 가정교육의 정도를 의심받게 되고, 심지어는 정신상태가 이상한 여자쯤으로 오인 받기 일쑤였다.


현모양처의 꿈은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스스로 원해서일 뿐 아니라 그 여성을 포함하는 가족단위, 또한 남성사회 전체에서도 매우 지당하고 위대한 것으로까지 포장되고 날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모양처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현모양처로 태어났으며 현모양처로 길들여져 살아가는가. 왜 현모양처의 위선과 허울뿐인 미명에 현혹되어 그토록 간절하게 현모양처 되기를 갈구했던가.


20대에 나는 거기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나 역시 대다수 현모양처 증후군에 잠식당한 여성들처럼 자연스럽게 현모양처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현모양처는 어쩌면 시종일관 속임수였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나의 2,30대는 한 인간으로서 사고의 짬도 주어지지 않은 채 허둥지둥 무작정 쫓겨야 했다.


처녀에서 어머니로 승격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공주에서 하녀로 급전직하했다는 표현은 오히려 진부하다. 회오리 광풍 치고도 토네이도 한가운데쯤이었고, 헤쳐 나올 수 없는 급류 속의 함정 같은 여울목이었다. 변화가 아니라 깡그리 괴멸이었고, 새로운 세계나 발전 향상은커녕 조선시대, 고려, 삼국시대, 고조선 시대를 함께 넘나들면서 자조와 체념, 절망을 배웠다.


아이들이 커가고 현모양처의 일손이 약간은 뜸해진 40대에 이르러서야 금간 거울 한쪽을 들고 허옇게 사위어버린 애달픈 청춘 한 조각과 해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조로증의 젊은 할머니가 한숨 쉬기도 벅차하며 거기 넋을 잃고 있었다.

그 몰골이라니! 그때 이미 나의 현모양처는 산 시체가 되어 방 한쪽에서 향기롭지 못한 냄새를 풍기고 있고, 현모양처 찬가를 목청껏 읊어대던 남편은 울타리 밖에서 전혀 다른 남자로 고급한 변신을 치르고 난 후였다. 그는 점점 멀리 떠나갔고, 공허한 현모양처 자리만이 운현궁의 비애 서린 뜨락 한편에서 참혹히 말라가는 우물처럼, 폭삭! 소리도 못 내고 내려앉았다.


교회나 가야 겨우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자를 들어볼 수 있어서 그 알량한 기쁨 누리려고 구역장도 해보고 집사님도 되어보았다.

봄꽃 피는 동산을 보아도, 무성한 여름나무 숲에도, 풍성한 가을의 황금 들판이나 흰 눈 내리는 호젓한 산길에서조차도 ‘나[我]’는 안보였다. 이 지구상의 어느 모서리에도 나의 반짝이는 모습은 한 꺼풀도 남아있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한 건 그래도 누구에겐가 하소연할 상대가 있을 때의 한가한 얘기다. 탈진하고 설움에 겨워 눈물도 마른 상태였다. 그럴 때 나는 ‘참나[眞我]’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죽더라도 우선은 나를 찾아놓고 나를 만나보고 나서 땅 속에 묻히고 싶었다.


미친 듯이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목숨의 마지막 편린이 아직도 숨을 할딱이고 있다면 나를 찾는 노역은 마침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란 오기도 발동했다.


내가 쓴 소설 <마흔 넷의 반란> 3권은 결국 나를 찾는 처절한 자아찾기 운동의 일환이었다. 내가 찾아다니던 ‘나’가 글 갈피 속 어딘가에 숨어서 채 끊어지지 않은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은 나를 현모양처의 허황한 사기술에 몰두했을 때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되게 유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란에나 그치고 만 것일까. 성공하면 대통령도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반란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의 우매함이 현모양처의 허상을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반란은 언제까지나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서 처절하게 외쳐댄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가부장제의 망령에서 여태도 놓여나지 못한 남성들에게도 반란을 시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나의 ‘마흔넷의 반란’ 이후 신문이나 서점가에는 아내의 반란, 꽃들의 반란, 투수의 반란…… 등의 숱한 반란이 홍수를 이루었다. 나는 그들 반란의 군상(群像)을 보면서 허탈한 감회를 누를 길 없다. 비록 나의 역사적인 ‘반란’이 불발탄이 되었거나 보다 확실한 미래로 유보되었다 할지라도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절망은 없다. 다만 반란이 찬란한 성공으로 결말을 맺을 수 있도록 나는 내 안의 충성스런 반란군에게 제2의 명령과 신호를 보낼 따름이다.


‘반란’이 있는 곳에는 개혁과 전진이 있다고 확신한다.

 ‘반란’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기폭제가 되길 기원해본다.

 ‘반란’이여! 나의 구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