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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변영희

능엄주 2016. 12. 28. 21:12

세모에 멀리 안동으로부터 사과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포장한 상자를 풀어 보니 빨간 사과들이 소복 담겨 있었다. 하긴 사과를 받기 며칠 전쯤 안부전화를 받았다. 가을 추수가 끝나 김장도 해 넣고 사과도 땄다면서 사과 알이 굵지 않고 빛깔도 좋지 않지만 맛은 좋다는 그런 얘기였다. 작년에도 아니 그 전해에도 나는 안동에 사는 그녀에게서 그와 똑같은 사연과 함께 사과를 받은 일이 있다.


사과 과수원을 한다는 그녀는 성격이 밝고 활발했다. 우리는 수년 전 이른 봄에 경상북도 안동의 정형외과에서 만난, 이를테면 환자동기생인 셈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도 나도 유난히 눈이 많이 온 그해 겨울, 빙판에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고 3~4개월이나 입원생활을 했다. 그녀는 대퇴골 안쪽 부분과 다리를 많이 다쳐서 물리치료를 할 때도 꼭 휠체어를 타고 갔고, 나는 왼손 팔목 뼈가 부서져 요상하게 생긴 쇠꼬챙이를 박고, 팔을 하늘로 쳐들고 다닐 때 우연히 병원 옥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추운 날은 병실에 갇혀 나오지도 못하고 지루하게 지내다가 그나마 날씨가 좀 풀렸다 싶으면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쭉꽃 잔치, 흰색 연분홍 진분홍 빨강색 등의 철쭉 동산에 올라가곤 했다. 병원엔 옥상의 철쭉나무들과 소나무 몇 그루, 그리고 백목련과 자목련나무를 빼면 달리 멋진 정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이라도 몸을 쓸 수 있는 환자들은 다투어 이곳을 찾아오곤 하였다.


옥상에서 바라보면 안동댐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물줄기가 구불구불 느슨하게 누워 있고, 낙동강 건너편엔 아파트와 상가 건물이 다른 세계처럼 아득히 바라보였다. 우리는 저녁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서 낙동강에 어리는 저녁 빛을 즐겼고, 병원에서의 쓸쓸한 생활을 환우들과 사귀는 것으로 잊곤 하였다.


과수원집 여자는 먼저 올라오면 먼저 올라온 대로 내 얼굴을 찾았고, 나 역시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철쭉꽃과 낙동강의 석양이 반쯤 그 매력을 잃을 만큼 그녀의 존재는 내게 각별했다. 물리치료실에 갈 때에도 대기실에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가면서 서로의 증세를 묻고 대답하고 하는 사이 우리는 친 형제처럼 정이 들었다.


2인실의 내 병상은 입원비가 조금 비싼 이유도 있지만 바로 중환지실 옆이어서 거의 매일 밤 사람이 죽어나갔다. 간장을 에이는 듯한 통곡소리가 잠 못 자는 환자들을 자극했다. 그래저래 나는 독실이나 마찬가지로 혼자서 2인실을 사용했다. 6인실 4인실은 병실이 비기 바쁘게 메워지고 화장실도 병실 밖의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왼쪽 팔에 무거운 쇠꼬챙이를 박고 있는 나는 통곡소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처음 들어간 2인실에 계속 있게 되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서울 대도시와는 다르게 병실은 만남의 장소로서 왁자지껄 소란해진다. 올 사람이 별로 없는 나는 이 병실 저 병실을 기웃대지 않고서도 쑥떡 인절미 귤 사과 음료수 등 많은 것을 얻어먹기도 하고 환자가족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그런 날은 무슨 파티에 초대된 것처럼 마음이 더 없이 푸근했다.


마침내 무겁게 찍어누르던 쇠꼬챙이를 뽑고 퇴원하는 날이 다가왔다.  거의 100일 만이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퇴원하기 전 택시를 대절하여 안동댐으로 함께 출타, 놀러가는 계획을 세웠다. 일종의 환송회였다. 그 지역에 주소를 둔 환자들은 서울로 떠나는 나를 위해 야유회 준비를 했으나 환자들의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다. 환의를 벗어버리고 일반 다른 옷을 입고 몰래 나갈 뜻도 세웠으나 사전에 눈치를 챈 간호사의 완강한 저지로 나가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옥상에 간단한 송별연을 마련했다. 가족들이 가지고 온 닭고기며 약식 인절미 그리고 내가 병원 밖 마트에 나가서 조달해온 칠레포도와 방울토마토, 매실 캔 등으로 조촐한 상이 차려지고 우리는 ‘건강을 위하여’ 를 외치며 음료수를 훌쩍훌쩍 마셨다. 나지막하게 노래도 불렀다.


목련꽃 그늘아래서 벨텔의 편지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모를 항구에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준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내 목소리는 모진 통증으로 예전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즐거운 밤이었다.

“안녕! 잘 가시오.“

“전화 하는 것 잊지 맙시다!”

이튿날 아침 엘리베이터까지 배웅 나온 환우들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어언 3년이 흐르고 나는 과수원집 그녀가 다리가 다 완쾌되지 않은 상태로 과수원 일을 하는 것을 전화로 혹은 편지로 알고 있었다.


“사과꽃 피면 놀러 와요!”

달밤에 보는 사과꽃이 기가 막히다는 그녀. 사과꽃이 3번이나 피고 지는 사이 많은 시간이 흘러갔으나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 하였다.

“사과 딸 때는 꼭 와요. 얼매나 이쁘다고…….”

그녀의 천진스러운, 맑은 음성이 귀에 쟁쟁했지만, 그녀의 과수원집에서 한 사흘 쉬었다 가라는 고마운 권고에도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얄미운 매미(태풍)가 핥고 지나간 자리에 어김없이 주렁주렁 열매 맺은, 그녀의 땀의 결정체인 사과를 먹으며 나는 다짐한다.

사과꽃! 그래. 이 번 봄엔 놓치지 말아야지. 나는 그녀의 사과처럼 싱그런 꿈을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밤에 만나는 꿈. 안동병원 옥상에서 만난 그녀, 사과꽃을 닮은 얼굴을 그리며 나는 새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쇠꼬챙이가 박혀 있던 내 왼쪽 팔을 바라본다.  보기 흉한 상처가 남아 있는 내 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