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무궁화호 열차
참으로 모처럼이었다.
여자 형제 셋이서 함께 가을 나들이를 간다는 것은 생각대로 쉽지 않았다.
얘가 간다하면 쟤가 안 되었다. 그 둘이 시간을 낼 수 있다 할 때는 또 내가 그들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그게 오래전이다.
우리는 늘 자가용도 말고 버스도 아니고 오직 기차여행을 원했다.
딱 2시간 거리였으나 그 시간만큼 알차고 행복해보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동생들과 기차여행을 도모하기 전부터 이미 딸애와 함께 일년 여 이상 매달 한 번씩 대청호 언덕의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곤 했다.
틈만 나면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그리고 강화 보문사 등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라는 도량을 찾아 다니다가
얼마전부터 차라리 부모님 산소로 방향타를 돌린 것이다.
그것은 아주 획기적인 변화였으며, 이번 경우는 부모님, 조상님을 우선순위에 둔 결과였다.
생각해보면 부모님 생전에 잘 한 것보다는 잘 못한 것이 더 많은 것 같아 결과적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은 늘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고 믿었던 것일까.
굳이 효도라는 관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생전에 부모님 모시기를 등한히 했거나 몰지각한 면이 너무나 다분했다 싶기도 해서였다.
이른 새벽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남녘으로 달리노라면 우리의 무딘 감수성은 콧노래를 부를 만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를 것이다.
단 2시간에 걸친 짧은 여행이지만 우리는 새벽안개에 쌓인 역사주변과 철로가의 금잔화, 장미, 무궁화, 능소화꽃을 바라보며
부모님의 환영을, 유자 수세미 나팔꽃 더덕넝쿨이 휘휘 늘어진 어머니의 남주동 꽃밭을 그려볼 것이다.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로 환원해보는 즐거움도 그 무엇에 비길 바 없이 컸다.
수시로 형제들과 문자 카톡 전화가 오고가는 동안 우리들의 마음은 어느 사이 대청호 골짜기에 서식하는 물총새 날개짓이 연상되고,
날샌 다람쥐의 꼬리, 산딸기와 엉컹퀴의 보랏빛 꽃대가, 좌우로 펼쳐진 대청호 푸른 물줄기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대전의 올케는 시누이 3명을 맞을 준비로 그 전화 음성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 어린 소녀처럼 기쁨에 둥둥 떠 있던 어느날.
마치 그건 지렁이 우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외양간의 소가 여물을 씹다가 불현듯 주인에게 요구사항을 알리는 신호음이었을까.
표현하기 어려운 저음의, 결코 그다지 선명하고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그것은 스마트폰에 문자찍히는 소리였다.
"고객님이 예약한 열차는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코레일"
그 시간 이후 우리들의 소박한 가을 낭만은 급속히 희석, 증발해가는 추세였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코를 못 쳐들 정도로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조금은 아쉬운 감이 남았으나 새롭게 11월의 휴일을 기약하며 분주한 일상에 파묻히게 되었다.
낭만의 무궁화호 열차!
그렇다. 나에게는 영원히 잊지못할 추억의 열차였다. 그 누가 알 것인가. 나만의 추억을.
나는 형제들과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비밀한 미소를 지어볼 것이다.
열흘 남짓 지나면 11월이다.
나는 다가올 11월을 꿈꾸며 시험준비를 서두른다.
시험을 끝내고 오라는 부모님의 메세지를 받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