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5)
“두석아! 여기 바위에 좀 쉬었다 가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잔등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게 해주었다.
“아버지! 발 아파요! 그만 가면 안 돼요?”
두석이가 물집이 잡혔다가 헐어버린 발바닥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하연순 여사가 몸을 일으켜보려고 손으로 바위를 잡는다.
“가만있어, 임자! 움직이면 안 되어!”
우정식 씨가 얼른 하연순 여사를 바위에 곧추 앉혀준다.
“두석아! 너, 봤잖아. 청색이 이기는 거. 조금만 더 참자.”
“임자도 힘들지? 물 좀 마셔!”
아버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커다란 망태기에서 물병을 꺼내 어머니에게 주었다.
“쿠르륵! 쿠르륵!”
하연순 여사의 식도로 내려가는 물소리가 우정식 씨에게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정식 씨 마음속에 하연순 여사가 살 수 있다는 실오리 같은 한 가닥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아! 다음은 우리 아들 두석이가 마실까?”
아버지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두석이에게 물병을 쥐어준다.
“옳지! 우리 두석이는 대한민국의 용감한 어린이다!”
아버지가 두석이를 격려해 주었다.
“아버지 먼저 드세요!”
두석이는 물병을 아버지에게 도로 내어준다.
어찌하든지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 죄도 없는 젊은 아녀자를 끌어다 초죽음을 시킨 그들에게 원수를 갚아야 한다.
우정식 씨의 내부에서 분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가장이 없는 집안에 쳐들어와 인민공화국 간판을 걸어 놓은 그 자체만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 일,
하물며 임신 중인 아녀자를 붙잡아다 생사를 알 길 없는 남편을 내놓으라 하고,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뱃속의 태아까지 희생시키다니…….
하연순 여사의 임신은 그들 부부에게 10년 만의 경사였다.
두석이를 낳은 후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가 근근이 이룬 그들 가문의 소박한 꿈이었다.
“쿵! 쿵! 쿵!
대포소리가 더 크게, 더 오래 울렸다. 지축이 울리고 산천이 놀라 요동쳤다.
“아버지! 대포소리가 크게 들려요!”
두석이는 조금 전에 비해 생기를 되찾은 듯, 살 껍질이 벗겨진 발가락에 양발을 끼우며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등에 업었다.
동쪽으로부터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 좀 챙겨가지고 가야겠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하연순 여사의 몸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치료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몇 주가 지났다.
산속의 청량한 공기가 두석이네 가족의 절박함을 극명하게 대변해 주었다.
“아버지! 인민군이 우리 집에서 나갔어요?”
“그놈들도 대포소리 듣고 도망갔을 거야…….”
아버지가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하연순 여사의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도리질을 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퀭한 눈에 두려움이 담뿍 담겨있다.
아버지가 걸음을 늦추었다.
두석이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임자! 왜 그래? 물마실까?”
아버지가 재빨리 한 손으로 하연순 여사의 몸체를 떠 바치고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물병을 꺼내려고 몸을 틀었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하연순 여사가 비명을 지르며 번개처럼 아버지의 등허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산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뒷걸음질이 어찌나 민첩한지 우정식 씨는 물병을 꺼내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어머니! 아, 안 돼!”
두석이가 외쳤다.
숲속은 캄캄 어둠이었다.
“아, 악!”
새벽을 찢는 고성이 온 산을 쩌렁, 흔들었다.
그 시간 이후 하연순 여사의 어떤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쿵! 쿵! 쿵!’
대포소리가 더 가깝게 더 크게 들려왔다.
“임자! 임자!”
“어머니! 어머니!"
우정식 씨와 두석이가 산 아래를 굽어보며 목청껏 소리쳤다.
막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에 비로암(毘盧庵) 대웅전의 기와문양이 장엄하게 드러났다.
대웅전 계단 옆으로 천일홍 나무가 발갛게 꽃을 피웠고 반대편엔 꽤 큰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온 천지를 휩쓸어도 비로암의 무궁화나무는 줄기차게 하얀 꽃을 피워냈으며 여전히 숱한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온 해명 스님 귀에 불현듯 괴이쩍은 소리가 잡혔다.
“처어~벅! 처 ~처, 벅~!”
불규칙하고 요령 없는 소리였다.
한 번 들린 후 끊어졌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들려왔다.
혹 길 잃은 산짐승일까, 사람일까. 이 산중에 이런 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먼 듯 가깝게 들려오는 그 소리, 쇠잔하여 잦아드는 그 소리는 해명 스님에게 생사기로의 위급함을 전하고 있었다.
행자 스님이 구르다시피 산을 내려갔다.
해명 스님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게, 누구요? 누구 있소?”
앞서 가던 행자 스님이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쥐고 큰소리로 외쳤다.
‘게 누구요? 누구 있소?’
숲에서 메아리가 대답했다.
그 시각 법당 뜰에는 하얀 색 겹 무궁화 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 모시옷을 곱게 차려 입은 두석이 어머니의 미소처럼.
황금빛 가을 햇살이 하얀 색 겹 무궁화 꽃잎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 출처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
★수상 : 무궁화문학상 대상. 손소희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저서:소설:[마흔넷의 반란3부작][황홀한 외출] [영혼사진관][오년 후][사랑, 파도를 넘 다]
수필집:[엄마는 염려 마][뭐가 잘 났다고][거울 연못의 나무 그림자] [갈 곳 있는 노년][몰두의 단계][나의 삶 나의 길][비오는 밤의 꽃다발][애인 없으 세요?][문득 외로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