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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 (4)

능엄주 2016. 9. 27. 10:19

쿵! 쿵! 쿵!

대포소리가 먼 곳에서 둔중하게 들려왔다.

쿵! 쿵! 쿵!

더 자주 연달아 들렸다.

“두석아! 우리는 여기를 떠나야 된다! 어서! 옷 입어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포대기를 들씌워 들쳐 업었다.

해명 스님이 소리 없이 다가와 아버지 등에 업힌 어머니의 훌쭉한 볼을 쓰다듬었다.

해명 스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힌다.

“가다가 요기라도 하고 가시게!”

해명 스님이 아버지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고는 새벽안개 속에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아버지! 우리만 가는 거예요?”

두석이는 친구들과 함께 달빛과 물, 색경이 함께 연출하는 달밤의 행사를 더는 계속할 수 없는 점이 섭섭했다.

그들은 큰 길을 피해 길이 아닌 길, 마을 뒤 고샅으로 돌아서 나왔다.

잡초와 잡목이 어우러진 등성이에 무궁화나무 몇 그루가 열 지어 서 있었다.

무궁화나무 둥치는 제법 실해 보였다.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새벽이슬을 머금고 함초롬히 꽃잎이 벌어지려는가.

어둠가운데 하얀 꽃빛깔이 돋보였다.

꽃송이들이 서로 소곤거리며 두석이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C초등학교에서는 전 학년이 식목일에 무궁화나무를 심었다.

실습농원 가장자리에 심은 무궁화나무가 자라서 차례로 꽃을 피웠다.

벚꽃처럼 미친 듯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게 아니었다.

한 송이 두 송이 질서 있고 침착하게, 어떤 때는 여러 송이가 더불어 피어나는 무궁화 꽃.

어제 피었던 꽃에 이어서 내일은 또 다른 나무, 다른 가지에 솟아오르는 연보랏빛 무궁화 꽃.

흰 색깔도 있고 분홍색도 있었던가.

미술시간에는 무궁화 꽃 그리기 대회가 열렸다.

운동장에 나 앉아 크레파스로 무궁화를 색칠하던 일, 아, 왜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어머니는 왜 인민군에게 집을 통째로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수시로 불려나가 거동을 못할 만큼 저 지경이 된 것인가.

다른 이웃들은 C시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버지는 왜 서울로 가자하시는가.

무궁화 꽃을 보는 순간 왜? 왜? 하면서 잡다한 생각들이 두석이의 감각을 괴롭혔다.

두석이네 일가는 산길로, 숲속의 외진 길로 돌아서갔다.

고단한 행군이었다. 많이 걸어도 하루 십리 정도가 고작이었다.

쿵! 쿵! 쿵!

대포소리가 더욱 잦아지는가 싶었다.

“곧 우리 국군이 서울로 올라올 겁니다!”

간혹 산길에서 만난 피난민들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그들도 서울로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죽은 듯 아버지 등에 엎드려 있다.

어머니를 들쳐 업은 아버지는 비지땀을 흘리고 걸어간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발걸음이 가끔 휘청거리는 기미를 짐작할 수 있다.

두석이는 더욱 힘을 내어 아버지를 따라갔다.

국어시간에 배웠다. 무궁화 꽃은 은근과 끈기가 생명이라는 것을.

두석이는 꽃이 피어나는가 하면 지고, 지는가 싶으면 피어나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피어나는 무궁화 꽃이 신기했다.

벌레도 잘 타지 않고 추위와 더위에도 잘 견디는 식물, 철난 아이처럼 덕성스럽고 무던한 무궁화(無窮花)!

무궁화 꽃잎 다섯 개는 나무, 불, 흙, 쇠, 물을 말하며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행(五行), 오성(五星)을 뜻한다고 국어선생님 말씀이었던가. 여기서 잠시 C초등학교 2학년 두석이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러운 두석이의 기억력은 전쟁이 일어난 후 겪게 된 극심한 배고픔과 죽음에 버금가는 공포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두석이만의 위기의식! 어머니 하연순 여사에 대한 깊은 슬픔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시대 애국자들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간에 숨어들어 몰래 무궁화 묘목을 길렀다고 한다.

무궁화는 누가 돌보지 않아도 수더분하게 잘 자라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일본경찰은 무궁화나무를 보는 족족 불살라버리거나 뽑아버렸다고 했다.

외딴 무덤가에 무궁화나무가 저 혼자 자라 꽃피고 있으면 그들은 그 무덤까지 파헤쳤다고 하던가.

그 이유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꽃♪

두석이는 1학년 때 배운 무궁화 꽃 노래가사를 외우며 C시의 집 앞마당에 심겨진 무궁화나무를 기억했다.

졸지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쳐서 화단을 훼손하고 그 위에 쌀가마를 산처럼 쌓아놓기 전까지 화단 풍경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움과 평화였다. 많은 화초 가운데서 무궁화 꽃은 달리아, 장미, 양귀비의 세련미와 화려함 대신 순박함과 순결, 겸손의 덕을 지니고 있었다. 하얀 교복을 잘 다림질하여 입은 여학교에 갓 입학한 시골 소녀처럼 미덥고 수수했다.

자태를 뽐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무궁화 꽃은 두석이 생각에 어머니의 성품을 똑 닮아있었다.

괴뢰군들은 나라꽃 무궁화도 어머니도 몰라보았다.

한창 꽃 피기 시작한 무궁화나무에 쌀가마를 쌓았으니 꽃과 가지가 어머니처럼 무참히 짓밟혔을 터이다.

전쟁의 피바람이 물러가면 무궁화도 어머니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무궁화는 은근과 인내, 끈기를 자랑하는 꽃이니까. 어머니는 무궁화 꽃이다. 무궁화 꽃은 어머니다!

두석이가 돌연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