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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 (2)

능엄주 2016. 9. 27. 10:09

“야! 이 악질 반동 에미나이! 바른대로 말하라우야! ”

한 마디 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산골 이발소에서 면도날을 갈을 때 사용함직한 굵다란 가죽 혁띠가 어머니의 몸을 향해 휘리릭! 날아왔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그녀가 몸을 피한다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등, 이마, 머리 정수리, 배, 팔뚝 언저리에 가죽 혁띠가 더 세게 날아왔다.

입술이 짓이겨지고 머리 부분과 이마는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붉은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하연순 여사는 피를 내뿜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했다.

피의 소리에 이어 쇠심줄을 끊듯이, 혹은 돌덩이를 부수듯 이를 뿌드득! 오지게 갈았다.

헛! 허어이! 헛, 허, 어,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치워라! 이놈들아!

그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다가 얼도 뜻도 없는 망측한 발음이 핏줄기를 튀기며 하연순 여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바른대로 불으라우! 살고 싶으면 우정식 반동새끼 숨은 곳을 빨리 말하라우! 이 독종 반동 에미나이!”

철썩! 철썩!

가죽 혁띠가 공중에서 휘리릭! 하고 내려오면서 하연순 여사의 아랫도리를 서너 차례 강타했다.

어떤 손이 하연순 여사의 저고리 고름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그 서슬에 치마 단이 툭 터지고 속곳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반동 에미나이! 마구 두들겨 패라우!”

누군가가 옆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휘리릭!!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연속 내려치는 가죽 혁띠의 공격에 하연순 여사의 몸이 허무러진다.

그녀는 더 이상 어떤 항거도 못한다. 그녀는 눈을 허옇게 뒤집어 뜨고 기절해버렸다.

괴뢰군들은 이웃사람 중에서 유독 하연순 여사를 들들 볶았다.

반동에 악질이란 단서를 하나 더 붙였다.

C시의 유지급인 남편 우정식 씨는 대한청년회 창립멤버였고 하연순 여사는 대한부인회 간부였다.

“바른대로 불면 집에 보내준다! 자, 말해! 니 남편 어디 숨겨놨나?”

이북에서 넘어온 빨갱이보다 C시에 사는 신생빨갱이가 더 기승을 부렸다.

신생빨갱이는 하연순 여사에게 안면이 있는 사내였다.

그는 하필 하연순 여사의 면상을 수차례 후려쳤다.

이마에서 코언저리로 굵은 선이 그어지면서 새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얼굴을 감싸느라 몸을 넙죽 숙이고 두 팔을 올리자 또다시 악마의 가죽 혁띠가 하연순 여사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하연순 여사는 ‘헛! 허어이’ 외에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서른다섯 하연순 여사의 몸이 통나무 쓰러지듯 나동그라졌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울부짖던 외마디 비명도 달빛 속에 스러졌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유난히 붉고 진득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람형체를 띤 생피 덩어리였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몸 안에 깃든 생명체가 유명을 달리했다.

하연순 여사가 사망한 한 줄 안 것일까. 죽을 것이라 예상한 것일까.

괴뢰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거적때기를 가져와 그녀를 둘둘 말았다.

그들은 신작로 복판에 그녀를 내던지고 도망갔다.

달빛이 그 모든 정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웃사람들이 네댓 모여왔다. 묘안이 없었다.

보다 못해 옆집에 사는 점백이 아버지가 지게에 그녀를 짊어지고 달밤을 달려 원능골로 숨어들었다.

이웃들도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간단한 가재도구를 싸들고 원능골로 옮겨 왔다.

점백이네 친척이 원능골 토박이라고 했다. 어려서 출가하여 작은 암자를 꾸린 하연순 여사의 사촌언니가 그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〇〇천을 건너 산등성이를 타고 시오리쯤 올라가다가 소나무 숲에 이르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한쪽은 소나무 숲 저 아래로 푸른 들판이 이어지고, 반대쪽은 금광으로 이름난 B면으로 가는 자갈과 모래밭 길이었다.

원능골은 푸른 들판 그 너머로 큰 산 작은 산이 겹겹으로 둘러싼 작은 마을이었다.

산 밑에 초가집 몇 채가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피난을 떠난 마을에는 개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원능골은 마을로 올라오는 외길만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곧 그 기척을 알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두석이네를 제외하고는 낮에는 주로 산속에 파 놓은 방공호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왔다.

더러는 양식을 채집하러 들에 나가기도 했으나 모든 활동에 제약이 따랐다.

대개는 위험을 감수하고 깊은 산으로 헤매고 다녀야 산나물이라도 캐올 수가 있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수도 서울은 사흘 안에 사수할 것이니 국민 여러분은 정부와 군을 믿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석이 네는 말할 것도 없고 점백이 방굴이 언년이와 만식이 네는 라디오 방송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들은 피난 떠나기를 주저했다.

“……전 국민은 군을 신뢰하고 미동함이 없이 각자의 직장을 고수하면서 군 작전에 협력하기 바란다 …….”

라디오 방송도 며칠 못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하연순 여사의 참혹한 비극은 막이 올랐다.

C시의 중앙에 위치한 하연순 여사의 집은 C도와 C시를 아우르는 북조선 인민공화국 여성동맹위원회 사무실로 접수되었다.

이불 한 채, 식량 한 톨 끄집어내지 못한 채 하연순 여사는 아들과 함께 뒤란의 골방으로 내몰렸다.

붉은 완장을 찬 애송이 인민군을 비롯하여 나이 든 장교들 몇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층 창문에는 ‘남조선 해방’ 이라는 대형 글씨가 나붙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프랜카드가 사진과 함께 대문 위에 내걸렸다.

우정식 씨의 일층 사무실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너른 마당에는 화단의 수많은 화초들과 무궁화나무를 짓뭉개고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 쌀은 전선의 인민군에게 보낼 미수가루를 만든다고 했다.

하연순 여사는 매일이다시피 집 밖으로 끌려 나갔다.

도 경찰국 소속의 관용차가 대문 앞에서 부릉거리면 두석이가 잽싸게 뛰어나왔다.

“야잇! 악질반동 새끼! 저리 비키지 못해!”

따발총을 빼어들고 애송이 인민군이 어머니를 따라가려고 떼를 쓰는 두석이를 위협했다.

그런 날 저녁이면 어머니 하연순 여사는 옷과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밤새 꿍꿍 앓는 소리를 냈다.

두석이가 어머니의 형상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면 어머니는 두석이 입을 막는 시늉을 해보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머니가 끌려갈 때마다 두석은 장독대 옆 화단에서 막 익기 시작한 꽈리를 땄다.

풋내 나는 꽈리를 입에 넣고 씹으며 한 여름의 공포와 허기를 달랬다.

무슨 기척이 나거나 발소리가 들리면 소년은 뒷문에 붙어있는 목욕탕의 커다란 무쇠 솥 안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