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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 (1)

능엄주 2016. 9. 27. 10:02

어머니 꽃, 하얀 무궁화

대낮 같이 달이 밝았다.

원능골 산 아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도 달빛은 부엌 안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냇물에 내려가 큰 대야 가득 물을 퍼가지고 왔다.

그 일에 앞장 선 것은 두석이였고 졸병처럼 뒤따르는 것은 두석이보다 세 살 아래인 점백이였다.

초가집 안방에서는 두석이 아버지가 구들장이 꺼지도록 거푸 한숨을 내쉬고 있다.

깊은 혼수에 빠진 두석이 어머니는 이따금 헛소리를 외칠 뿐이다.

외마디 비명 같기도 하고 혹은 누군가를 호되게 질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그 소리가 한 번씩 터져 나올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니의 머리맡에는 우그러진 양은 쟁반이 놓여있다. 쟁반에는 다 식어 파리 몇 마리가 교대로 날면서 잠시잠깐 앉았을까 말았을까 한 녹두죽 대접과, 반으로 쪼개진 수박위에 달챙이 놋숟가락 한 개가 얹혀 있었다.

“임자! 어여! 눈을 좀 떠보아요!”

두석이 아버지의 목소리에 간곡함이 묻어나왔다.

죽 한 숟갈이라도, 물 한 모금이라도 그 입에 넣어줄 요량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수군거리더니 뒤꼍으로 몰려갔다.

두석이가 돌담 근처 무궁화나무 옆에 대야를 내려놓았다.

깨진 색경 조각을 들고 뒤따르는 점백이, 방굴이와 언년이 만식이 등 동네 아이들 서넛이 두석이의 달빛 사업에 적극 가담했다.

그 밤 깨어 있는 것은 달빛과 아이들, 그리고 안방에서 어머니에게 수박 한 조각, 죽 한 숟갈을 권하는 두석이 아버지와 초가집 뒤란의 무궁화나무 두 그루뿐이었다.

무궁화나무 두 그루 중 하나는 보랏빛 꽃을 피웠고 또 한 그루는 하얀 색깔의 겹 무궁화나무였다.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어도 무궁화 꽃은 기죽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두석이 네가 떠나온 C시의 집에도 무궁화나무는 하얀 꽃을 피웠다.

화단 중앙에서 조금 비켜난 울타리 쪽에 심겨져 연달아 꽃을 피우는 모양새였다.

겹으로 피는 무궁화 하얀 꽃은 푸른 초원에 하얀 비단을 점점이 얹어 놓은 듯, 모시옷을 입은 하연순 여사의 수줍고 청초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것 봐라! 여기서는 잘 보인다!"

두석이 목소리가 달밤을 타고 주변의 나지막한 산으로 퍼져갔다.

점백이가 대야 물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한다.

“물이 흔들리면 암 것도 안 보인단 말여!”

두석이가 점백이에게 말했다.

“자 봐! 빨강색이 줄어들고 있어.”

점백이가 빨강색이 줄어든 것이 자기 공적인 듯 큰소리로 말했다.

초가집 안방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열리는 게 아니라 막강한 힘으로 콱! 밀어붙이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임자! 어딜 가려고? 지금 야밤인 거 몰라? 어허 참!”

탄식하는 소리에 이어 두석이 아버지의 고무신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두석이 어머니가 기성을 지르며 방문을 박차고 툇마루를 뛰어넘어 마당으로 내려섰다.

맨발에 단속곳 바람이었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새하얀 광목천을 입으로 찢는 소리일까?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도리질을 한다.

허공에 대고 두 팔을 휘젓는다.

달빛이 그런 그녀에게 그림자를 지어 준다.

어머니가 도리질을 하면 그림자가 도리질을 하고 어머니가 팔을 휘두르면 그림자도 팔을 휘둘렀다.

“어여! 들어가요! 그러다 고뿔 걸린다고, 어여!”

아버지가 어머니 팔을 붙잡으려고 나선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어머니는 허공에 대고 헛소리를 한 번 더 내지르더니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는다.

아버지가 다가가 어머니를 덥석 안았다. 몸피가 줄어 예닐곱 난 아이처럼 가벼웠다.

초가집 마당은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자, 봐라! 지금 빨강색이 더 넓게 퍼졌단 말야?”

대야 물에 잠긴 색경에는 태극 문양의 동그라미 형태가 나타났다.

동그라미는 빨강색과 청색 두 가지 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범위가 서로 다르다. 청색보다 빨강색이 훨씬 넓게 보인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이거 태극기잖아?”

초등 1학년인 만식이가 놀라 물었다.

학교에 다니다가 어머니가 줄줄이 낳는 동생들 돌보느라 2학년에서 학업을 멈춘 방굴이와, 금년 봄 3학년에 올라간 언년이도 두 눈에 호기심을 담고 대야 물과 두석이를 번갈아 쳐다본다.

“시방 아군이 밀린다는 거여 이건!”

두석이의 해설에 아이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형! 청색이 우리 국군이야?”

“응! 그렇다니까.”

아이들은 두석이의 해설에 무서움을 느낀다.

점백이, 방굴이와 언년이, 만식이가 하늘 한 번 보고, 대야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 두석이를 쳐다보았다.

달은 점점 높이 떠서 온 마을을 밝게 비추었다.

달빛이 대야 물에 폭 잠겨서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밤이 이슥했다. 산촌의 초가을 밤은 제법 서늘했다.

하얀 색 무궁화 꽃잎이 밤이슬에 젖어 그 형체가 점점 오그라들고 있었다.

“얘들아! 그만 집에 가자!”

두석이가 먼저 일어섰다.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두석이는 아버지 곁에 누웠다.

들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헛! 허어이! 악! 치치 이이……”

어머니의 비명이 달밤의 적요를 흔들었다.

어머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랜 동안 식음을 전폐한 여인네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그 기세가 놀랄 만큼 강해보였다.

쪽 머리가 풀어져 가슴께로 흘렀고 입가엔 허연 거품이 엉겨 붙었다.

목소리는 쇠어 가닥가닥 끊어진다.

어머니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을 뿐이다. 답답하여 자꾸 소리를 만들어 뱉는다.

아버지가 잠을 깼다.

달빛이 들창문을 지나서 아랫마을 뒷산 중턱에 걸려 있었다.

새벽이 머지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