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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능엄주 2021. 9. 28. 17:17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창밖의 풍경이 가히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묘해진다. 멀고 먼 남쪽 바다 외딴 섬, 노도의 비오는 날 정취는 더욱 볼 만 할듯. 시시각각으로 요술을 부리는 구름 나라가 산처럼 깊고 바다처럼 넓게 보이는 노도에서의 둘쨋 날. 나는 드럼세탁기에 물이 안 나와 애를 먹었다. 여기 오기전 며칠 전부터 바짝 긴장한 채 시장 보아오고, 짐 꾸리고, 우체국에 끌고가서 다섯 개의 짐을 발송하는 과정이 몹시 힘들었어도 나는 다만 서포 선생을 기억하면서 심신의 고달픔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5시 잠을 깨,  6시 40분 택시타고 김포공항에 가서 1시간 반 이상 대기할 때, 큰 가방에 넣은 모기향 불 붙이려고 찔러넣은 라이타 때문에 구내 방송에서 내 이름을 호출했다. 황망 중에 그걸 찾아내 쓰레기통에 버리는 해프닝. 등에 짊어진 노트북이 무거워서도 다른 사람보다 뒤쳐져 검색대를 통과해야했다. 떠나기 전날 나는 칼에 손바닥을 베었다. 어떤 안좋은 일의 전조였울까. 암시, 기미였을까. 라이타 사건으로 끝나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노도에서의 둘 째 날 오후

아! 멋있다. 경치가 정말 좋아요! 부모님을 모셔오고 싶어요.  옆 동의 시인 말이었다. 

경치 좋은 리조트에 관광온 거 아니잖아요. 

가족은 군청에 동의만 받으면 괜찮다고 했어요. 대구에서 온 그는 바다가 보이는 숙소가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여유로운 마음이 없다. 일 잡으면 밥도 잠도 잊어버린다. 아직은 정리 단계이고, 지형, 골목길 익히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나는 가끔 내가 미련해보이고 나자신에게 겁도 난다. 발동이 걸리면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다. 모쪼록 발동이 잘 걸리고,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고 건강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첫째 날은 남해의 모기떼 기습을 받고 잠을 설쳤다. 노도에서 첫날 밤은 모기, 날파리, 지네새끼 등의 집단공격을 받은 날, 레시던스 바로 아래가 수풀이라 보도 듣도 못한 온갖 벌레와 모기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모기향 피우고, 에프 킬라 수시로 살포했어도 나는 수 군데를 물렸고, 얼굴 전면에 벌건 반점이 새로 돋아났다.

둘째 날인 오늘은 드럼세탁기의 무작동으로 고난을 당했지 않은가. 관리기사 아저씨가 수요일, 그러니까 매주 수요일 휴무라하니 어쩔 방법이 없다. 세제를 넣었으니 싫어도 그걸 다시 꺼내 손빨래를 해야 한다. 웬 거품이 한정도 없이 발생하는가. 세면대에 물을 받아 수 차례 행구는데 빨래 몇 가지에 두세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화학 세제가 하천 오염뿐 아니라 금쪽 같은 내 시간을 뭉턱 잘라먹은 날이기도 하다. 

 

후두둑! 후두둑!

갑자기 베란다 마루짱을 울리며 소나기가 쏟아진다. 마치 정형외과 침상에서 쿵쾅거리며 온몸을 구석구석 두들겨주는 소위 안마 치료를 받을 때처럼. 상쾌한 빗소리다. 찌고 무더워 이곳은 여름 절기더니 시원한 빗줄기를 퍼붓는다. 기기묘묘한 그림을 그리던 구름떼가 한 순간 먹구름을 몰고 와 소나기로 변했다. 비바람 바닷바람 산바람이 휘몰아친다. 구름, 산, 바다, 사람사는 마을 전체가 우주공간의 광활한, 노도 특유의  색채로 통일된다. 이 비가 가을을 더 가까이, 더 깊이 불러오는 사령使令이 아닐까 싶다.

 

해질녘 비가 멎자 배 지나가는 엔진소리. 작은 고깃배안가, 말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지척이다. 소란한 일상을 떠나 고깃배를 탄 저이들도  모르면 몰라도 노도 섬의 그윽하고 호젓한 장점을 만끽하는 것일 게다. 첫날은 모기 떼, 둘째 날은 화학 세제 거품 행구기에 여념이 없는 나에게 고깃배 한 척이 반갑다. 

 

구름이 더 아래로 내려 앉아 어디까지가  구름이고 산인지. 바다인지. 마을인지 알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나' 가 아닐까. 내 생애 처음으로 갸슴이 확 트이는 진기한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 진기한 풍경이 나의 현실이 되기를 기도하고 기대한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나만의 밀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