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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추장 담그기

능엄주 2021. 8. 4. 19:13

막 고추장 담그기

 

아파트로 이사오고 나서, 아니 대수술 이후 고추장 된장 간장 등, 담그기를 멈추었다. 전에 어머니 살아계실 때 재료만 준비되면 조용조용히 어머니는 고추장을 담아 예쁜 항아리에 담아주셨다. 나는 곁에서 건성으로 봐 둔 것을 토대로 실습삼아 여러 해 동안 직접 담가 먹었다. 마트에서 사온 것 보다 훨씬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그렇게 직접 콩을 삶아 메주를 쑤기도 하면서 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지냈다.

 

아파트에서는 장독에 햇살 바라기가 자연스럽지 않았고, 가족도 줄어들어 굳이 수고를 하는 대신, 큰 사찰이나, 유기농 매장에서 양질의 고추가루에 매실청으로 담았다는 고추장을 종종 사 먹었다.

그런데 찹쌀과 매실청으로 담았다는 광고에 신뢰가 가서 구입을 했는데, 중국산 왕소금과 불량 고추가루를 사용했나. GMO 콩으로 제조했는가. 된장도 덩어리가 많아 끓여도 덩어리는 풀리지 않았고 맛도 몹시 썼다. 사서 먹는 장맛에 그만 질려 버리게 된 것이다.

 

이걸 발로 담갔나, 어디서 싸구려를 사다가 라벨만 바꿔 달았나 싶게, 그맛에 있어서 짜고 쓰고 빛깔조차 검으튀튀했다. 거론할 가치는커녕, 그딴 것을 구입한 내 수준이 의심스러웠다.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장맛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했다. 그걸 인제 알게 되었다고? 기실 최근에는 밥 대신 생감자즙과 과일을 먹거나, 밥을 먹어도 김치도(괴산 절임배추라는 게 장작개비처럼 두껍고 질긴 중국배추였다. 아는 처지에 어찌 이런 배추를 팔아?) 질렸고, 고추장도 잘 먹지 않고 지낸 게 오래 되었다.

 

냉동고를 뒤지다가 오래 묵은 고추가루를 발견했다. 어쩌려고 엿질금 가루도 있고, 메주가루도 있었다. 나는 엿질금을 물에 불려 반나절을 치대서 엿질금 물에 고추가루와 메주가루를 넣고 고루 잘 섞이도록 저었다. 메실 청을 넣고, 소주 대신 인삼주를 넣어 버무렸다. 전라도 화순에서 사온 고추가루의 매운 향기가 식욕을 불렀다.  아무 반찬도 없이 고추장만으로 점심밥을 대신했다. 양질의 화순 고추가루 덕분에 방금 담근 고추장 맛이 그럴 수 없이 좋았다.

 

수년 동안 습관처럼 장 구입을 계속한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3KG 정도 담으면 삼년이 갈지 더 갈지도 모른다. 먹을 입도 없는 형편에 과욕을 부린 것 같아 조금 걱정된다. 다시 냉동고를 열고 살펴보자니까 쑥을 말려 넣어둔 게 큰 봉지 가득 있었다. 대청호 언덕 부모님 산소에서 딸과 함께 뜯어온 것이었다. 어휴! 입맛 없는데 쑥국이나 끓여 먹어볼까. 역시나 막고추장 담기는 쓸모있는 일이었구나. 나는 혼자 감탄을 늘어놓으며 아픈 어깨를 주물렀다. 

 

집안일은 단순한 것 같지만, 더구나 한국 음식은 뜸들이고 숙성하고 뭐 좀 신경쓰는 일이 많은 것 같아서, 내 체력에는 조금 부쳤다. 나는 주방을 정리하고 맨손체조로 몸을 풀어주기로 한다.

 

벌레가 집 짓고 입주해서 파먹은 얼굴 상처가 진정되고 있어, 올여름의 악몽은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몸은 고달픈데 마음은 어렵게 막고추장까지 담아놓으니 그나마 안정 모드로 가는 듯 하여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