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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 그 후/변영희

능엄주 2019. 8. 5. 18:07

절대로 물러가지 않을 듯 기세등등하던 독감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완전 후퇴나 항복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기침을 덜 할 수 있고, 밤에  숙면은 아니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눈 붙일 수 있음을 고마워한다.

고마운 대상은 무섭고 겁나는 무간지옥이나 화탕지옥의 사자들인지, 아니라면 독감 바이러스인지, 아니면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처벙해준 독감 죽이기 약인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독감에 좋다는 것을 닥치는대로 음용한 덕분일까.


나의 조급함은 죽기 싫어서가 아니다.

죽어도 사람 품위를 갖추고 멋지게 죽어가야 할 것 아닌가. 독감의 수렁,  뻘밭, 늪에 빠져  허브적거리면서도 죽음의 품위니 멋 따위를 논하고 있는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은 장렬하거나, 적어도 가장 나 스러운 형태라야 한다는 평소의 내 지론이었을까. 어쨋든 나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냥 이승을 허겁지겁 하직하기는 꼴불견 일 것 같다는 생각을 평소에 해온 탓이기는 하다. 가래와 콧물 눈물,진땀이 범벅되어서 코를 쳐들기는 고사하고, 숨도 못 쉬고 헐떡 거리면서 생명 줄이 끊어지는 것은 차마 용납할 수 없는 지저분스럽고 처참한 귀결이 아닌가.


그 처절하고  가히 살인적인 기침이 2019년 7월 24일을 깃점으로 조금씩 가라앉은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독감 이 녀석도 내가 그날 영광스럽고 귀한 상을 받는 날임을 눈치챈 것일까. 몇 시간이나  대한민국예술인센터 너른 홀의  앞, 수상자 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안절부절했다. 지인들이 다가와 악수를 청해도 얼굴 표정을 펼 수 없이 괴로웠다. 아무 때나 솟구치는 기침때문이었다. 그래도 목 저 안쪽에서 숨죽여 캑! 캑! 거리기만 했지 가래가 그르렁그르렁 끓거나, 콧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던가, 코가 콱! 막혀 숨도 못 쉬는 최악의 증상은 면하게 해준 것만도  나는 내몸에 깃든 독감 권속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독감은 물러간 것이 아니라 잠복으로 모습을 감춘 것, 호시팀탐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내 영혼육을 점령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 불팔요한 가래를 배출시키는 것이 차라리 이치에 맞는 일이지, 음흉하게 복병처럼 숨어 시원하게 나가주지도 않고, 인후를 지키고 있다는 건 더욱 가공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민간요법도 할 만치 했고, 좋다는 약초 구입해서 닳여먹고 ,찌고 삶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하지만  '깨끗히' 는 결코 아니라는 것쯤 그간의 고초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골이 빈 것처럼 기침 한 번에 온몸이 휭! 내둘리고, 진땀이 24시간 쉴 새 없이 흘러 전신을 작은 개울로 만든 것, 이번 독감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악성 괴질이다.


지하철이 겁이 난다.약냉난방 칸에 가면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건강한 사람들의 상식이다.

독감 환자에게는 기준치 이상으로 씽씽! 틀어놓은 에어컨이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하다. 급한 일, 중요한 볼일 때문에(병의원 나들이) 잠시 외출하는 경우, 그날 밤은 여지없이 내 침상에 저승사자가 단체로 출현한다.

 '그깟 소설은 써서 뭐하니? 같이 가자! 자아! 우리를 따라 나서라. 이승이라고 지옥보다 못한 데 뭘 자꾸 미련을 가지는가?'

저승사자 우두머리의 호통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물러가야지. 기왕 기세를 꺾을 양이면 본때 있게 아량을 베풀어야지, 잠복이 뭐하자는 수작인가.

복병이 너 독감에게는 그다지도 호감가는 행위지침이던가.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라! 놈들아! 묻건대 나 같은 고달픈 중생 풀어주고, 대신 더 합당한 상대를 찾아보는게 어떠한가?

6월 24일 '[흠흠신서]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후부터, 그러니까 연세대학의 잘 가꾼 캠퍼스에서 저녁 선들바람을 즐기며 한 동안 찬바람에 노출된 것이 독감이 침투한 직접동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푸른 잔디밭 사이사이에 비치한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으스스 추웠다. 배도 착! 고팠지만  B 이사장님의 저녁식사 제의를 사양했다. 나의 컨디션이 그분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길 만큼 평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독감 세균들이 내 몸에 들어가 맹활동을 개시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냥 지나가는 가벼운 몸살 정도로 알았다. 2,3일  견뎌보다가 이비인후과에 갔다. 닥터는 별 것 아니라며 약 3일분을 처벙해주었다. 사단은 작은 데서 출발,했으나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사흘 치 약처벙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고 그밤부터 나는 중환자 상태로 추락했다. 기침은 낮도 밤도 없이 맹공격을 가해왔다.


지금 죽음과도 맞먹는 고비가 지나갔다고 안도할 수는 없다. 죽음을 거론하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오죽 고통을 겪어서야 죽음까지 이르겠는가. 독감은 그리 호락호락 나를 떠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남아 있다. 혹여 기력을 돋우거나, 신바람 나는 일이 팡! 터져서 기상천외하게 내 몸의 엔돌핀이 분수처럼 분출하여 까짓 독감 귀신쯤이야! 할 때는 예외가 될 것이지만.


나는 혐오스럽다. 독감귀신이 아니라 나의 허약한 체질이,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독감을 한달 이상 앓으면서 자책감에 빠지기는 처음 있는 일, 내 입에서 발설하지 않은 병증이 밖으로 떠돌 때의 그 자괴감! 그리고 핼쓱하다 못해 병색이 짙은 초라한 안색, 생기 잃은 눈동자. 기침이 지나쳐 구부러지는 허리를 받쳐줄 무슨 방법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


아! 이제 막을 내렸으면 좋겠다. 독감과의 악연을 끝내고 싶다.

나에게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저승사자가 왔다가 그냥 갈 거라는 D 선생님의 말씀도 빛을 잃을까 저어한다. 제발이지 독감이여!

너, 나에게 할 만큼 했다. 이런 횡포, 봉변이 어디 있는가.  95년의 큰 수술을 빼고, 극심한 병고는 너! 악질 독감말고는 없던 일이다.

이제 해방되고 싶다. 쟈유롭게 움직이고 싶다. 남은 삶을 가치있고 보람있게 연출하고자 한다.

독감은 더 이상 못된 짓을 멈추어라!  최후 명령을 내리는 바이다.

격전은 일단락 되었지만 기왕이면 잠복, 복병의 전략도 그만 거두기를 바란다. 독감 이놈아!